다수결이 주는 무력감
민주주의라는 것을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할 때 강조되는 것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패자는 승복하고 승자는 패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설명을 많은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 민주주의 사회이며, 투표라는 행위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유권자들은 갈수록 무력감을 느낀다.
왜일까. 탄핵정국에 들어서면서 정치권에서 한동안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한 개헌론이 불거졌다. 1987년 4자 필승론에 입각한 YS와 DJ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이후 한쪽에서는 지속적으로 결선투표를 요구해오고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결선투표는 진정 민의를 반영하는 것일까?
선거할 때마다 매번 당내경선 규칙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고, 현행 소선거구제도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서 이를 바꿔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다가 흐지부지되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아니, 정말 우리 사회만 저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일까?
다수결을 의심한다
『다수결을 의심한다』의 저자 사카이 도요타카(坂井豊貴)는 민주주의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다수결’에 대해 ‘과연 그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대의 민주사회에서 유권자가 느끼는 무력감에 대하여 ‘의사를 섬세하게 표명할 수 없거나 적절하게 반영할 수 없는 의사결정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저자의 주장은 막연하게 느껴오던 문제들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저자는 민주주의와 동일시되고 있는 다수결 원칙은 여러 의사결정 방식의 한 방안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수결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해온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초등학교 반장선거부터 대통령선거까지 1표라도 더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그것이 아닐 수 있다고?
다수결에서 벗어나다
경제학자인 저자는 I장 「다수결에서 벗어나다」에서 태평양의 섬나라 나우루와 키리바시의 선거방식을 포함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면서 일단 다수결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저자는 의사결정 방식을 둘러싼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어왔음을 이야기한다. 맞대결 다수결에서 다른 모든 후보에게 패배하는 최약체 후보(맞대결 패자)가 실제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최다득표를 얻어 승리를 거두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근본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저자는 어부지리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맞대결 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보르다 투표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르다 투표법은 3자 대결이라면 1위에게 3점, 2위에 2점, 3위에 1점을 주고, 그 합계에 따라 전체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나름 타당해 보이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럼 유권자가 알아서 점수를 주는 방식(자유할당점수제)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런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그런 경우 소수의 열광적 지지자가 있는 후보가 유리하다는 사례를 제시해주면서 자유할당점수제는 다수결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럼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보르다 투표법은 완벽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조직력이 높은 집단이 클론 후보를 내세워 상위를 독점하는 ‘클론 문제’의 경우 보르다 투표법도 무력화될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클론이라고 하면 뭔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정당 내 경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보자 간 서로 밀어주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조직력이 강한 세력이 상호 결탁하여 나머지 후보들을 배제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이행할 경우 왜곡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선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합종연횡’을 통한 선거전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 결과가 정말 ‘민의’를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궁극의 방정식을 찾다
저자는 II장 「민주주의를 위한 궁극의 방정식을 찾다」에서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인 콩도르세를 소환하여 맞대결 다수결에서 승리하는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라는 논리를 검토한다. 맞대결 패자를 선택하지 않는 방식(보르다)이 더 좋은가? 아니면 맞대결 승자(콩도르세)를 선택하는 것이 더 옮은 것일까?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는 두 방법 중 어느 것이 더 옮은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사실 어떠한 의사결정 방식을 선택해도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말케비치의 반례’를 통해 다섯 가지의 의사결정 방식이 모두 다른 결과를 나타내는 사례를 보여주면서 독자를 허무하게 만든다. 어떠한 방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과연 진정한 ‘민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본질적 회의에 대해 ‘상황을 고려한 의사결정 방식을 골라야 한다’라는 맞지만 맥빠지는 주장과 함께 ‘그래도 보르다가 그나마 좋음’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며 II장을 마무리한다.
왜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가
한참을 읽어왔는데 막상 맥빠지는 결론에 접한 독자에게 저자는 III장 「왜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가?」부터 새롭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올바른 판단이 무엇인데? 어떤 판단이 올바르다고 하는 거야?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한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끄집어온다.
루소는 사회계약의 기반으로서 차별과 편견을 허용하지 않는 ‘일반의지’를 가정하였으며, 이에 기반한 사회계약에 의해 사회는 소유권 보호와 인격존중,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다수결은 사회의 다수파가 발견한 일반의지를 따르는 것이고, 일반의지는 자신의 의지이기에 이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사회 구성원의 결정이 진정으로 차별과 편견을 허용하지 않은 이상적 상태의 결정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저자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념 중 하나인 사회계약론을 끌어와서 다시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지만 앞서 제시했던 의사결정론 관련 논의를 따라 여기까지 독자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논의가 추상화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저자는 IV장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직접민주제와 대표민주제의 이야기로 주제를 다시 전환한다. 직접민주주의가 민의를 도출하는데 더 정확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더 정확한 의사 표현이 가능할까? 저자는 중위투표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쟁점이 명확한 이슈의 경우 사람들이 선호하는 안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하고 그 가운데 위치한(중앙값, median) 안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각자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선택지의 정중앙을 선택한 것이므로 구성원 모두가 타협한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중위투표법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이슈라 하더라도 쟁점은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으며, 선호되는 안 역시 여러 층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중위투표법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저자 역시 헌법과 같은 상위의 법을 개정할 경우 중위투표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의 일을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책의 90% 가까이 진행된 시점에서 마지막 장인 V장 「우리의 일을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본질적 의문을 제기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통상 민주적 절차라고 생각하는 방법론들의 한계가 명확한 상황이라면 정부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제어하고 통제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도로개설을 둘러싼 갈등과정에서 수행한 주민투표가 투표율 미달로 개봉되지도 못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과연 누가 진정한 이해당사자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지금의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판단·결정하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 프로세스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럼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의 제목 ‘다수결을 의심한다’는 무척이나 도발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의사결정 방법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있었으며, 각 방법의 장점과 한계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점은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기본지식이 없더라도 저자의 설명을 읽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학자인 저자의 능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III-V장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내용과 연관되어 있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인 논의를 광범위하게 전개함으로써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일반의지 등의 논의를 책 서두로 옮겨 보다 간략하게 전개해 의사결정론과 관련된 내용의 배경설명 정도로 했으면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 같다. 특히 V장의 경우 지나치게 다양한 내용을 너무 간략하게 설명해 저자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질문을 던져본다. 그럼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국회법은 단순과반수 이외의 여러 형태의 투표방식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다수결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보완책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의민주제도가 형식화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본다면 의사결정 방법을 둘러싼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때 저자가 던진 ‘다수결을 의심한다’는 문제의식은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