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현지 시각으로 1월 20일 정오, 한국 시각으로는 1월 20일 오전 2시였다. 많은 이들이 취임식을 지켜보며 ‘정말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말에는 여러 함의가 담겨있다.
알다시피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상식을 뒤엎는 말과 행동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이민자, 유색인종, 여성에 대한 폄하 발언을 비롯해, 허위 사실로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과격하고 기묘한 언행 때문에 그가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이는 ‘트럼프가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출마한 것일 뿐 실제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을 것’이라며 낙선을 확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결국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선거기간 내내 결함이 있는 모습이 오히려 트럼프를 더욱 인간적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논리적이고 지적인 면을 과감히 감추고, 대신 화끈하고 솔직한 모습을 내세운 것이 대중에게 다가서는 데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를 두고 언론과 각계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반지성주의’의 승리다.
여기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천박함’ 또는 ‘대중의 말초적인 욕구에 기회주의적으로 올라타기’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우리가 트럼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바로 그 이미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 의미는 조금 다르다.
일본의 모리모토 안리森本 あんり는 그의 책 『반지성주의』에서 반지성주의를 미국이란 나라의 시작부터 이어온 하나의 흐름으로 본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17세기에 영국에서 종교적 탄압을 받은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서 (기존에 살던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아) 세운 나라다.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영국 현지에서도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초창기 이민자들의 정착지 인구 구성에서 대학 졸업자가 유럽 대륙과 비교할 때 현저히 높았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초창기 미국에서 대학 졸업자들만이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불문율이 되게끔 한다.
문제는 대학 졸업자들로 이루어진 목사들이 진행하는 초창기 미국 교회의 예배는 너무 따분했다는 점이다. 설교는 흡사 목사들이 얼마나 유식한지 과시하기 위한 시간 같았다. 설교 시간이 몇 시간씩 이어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9시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세상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목사들만큼 글 읽기에 시간을 쓸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들이 늘어놓는 장광설은 그들의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결국, 고지식한 목사들의 행태는 보통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태동한 신앙부흥 운동이 바로 그 반발을 대표한다. 신앙부흥 운동은 견해에 따라 집단 히스테리 증상으로도 여겨진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따분한 설교와는 달랐다는 사실이다.
연단에 선 설교자들은 다채로운 손짓과 몸짓 그리고 매끄러운 화술을 앞세워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설교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이따금 격한 감정을 경험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다가도 이내 구원을 얻었다는 기쁨에 흐느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묵힌 감정을 풀어내는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수많은 사람이 신앙부흥 운동이 주는 흥분의 경험에 중독된다. 미국에서 신앙부흥 운동은 하나의 거대한 사업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후 미국 개신교의 사업 방식을 그대로 들여온 우리나라 개신교도 이를 따라 한다.
어떤 상황인지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지금 유튜브에 가서 ‘신앙부흥회’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라. 큰 관중석에 수만 명의 교회 신도들이 자리잡고 중앙 연단에 선 설교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흥분하며 ‘아멘, 아멘’하며 외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수두룩하다.
다시 18세기 미국으로 돌아가보자. 신앙부흥운동을 이끄는 설교자들의 인기가 치솟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기존의 교회를 운영하던 기득권 목사들이 신앙부흥운동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구사하는 설교자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기득권 목사들 자신들도 사실은 영국의 종교 탄압을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이들이거나 그 후계자들이란 사실이다.
날이 갈수록 기득권을 지닌 목사들의 공격과 통제가 거세진다. 그러자 신앙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설교자들은 기득권 목사들을 향해 “당신들에게 학식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은 교육의 유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바로 여기서 반지성주의 정신의 핵심이 나타난다. 반지성주의는 오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무지가 더 낫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기득권 청교도 목사들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반지성주의는 이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반지성주의는 미국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후 19세기에는 노예 폐지 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민권운동과 소비자운동으로 다시 태어난다.
미국의 역사에서 반지성주의는 곧 ‘타인의 권위나 사회의 예법, 세간의 평판에 의존하지 말자’는 주장이다. ‘반권위주의’로서의 반지성주의다. 요약하면, 미국이란 나라를 이끌어온 원동력은 권위와 기득권에 대항하는 반지성주의였다.
한편, 반지성주의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흔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가치의 척도가 되는 바람에, 자신이 보기에 믿음이 없는 이들을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미국 개신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모습에서 말이다.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이들을 종교적인 악마의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모습. 절에 몰래 들어가서 무너지라고 기도회를 갖는 모습. 종파끼리 서로 정통성이 없는 이단이라고 물어뜯고 싸우는 모습. 자기 키만한 십자가를 메고 서울역과 명동을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고래고래 전도하는 모습. 바로 우리가 뉴스나 길거리에서 쉽게 접하는 개신교도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대로 세상을 이해한다.
타인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반지성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일깨우고 다양성을 꽃피운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나의 권리를 넘어서 남의 권리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남의 기준에 강요당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에게 내 기준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야 옳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청교도들이 머잖아 기득권 목사가 되어가는 모습. 그리고 그 기득권 목사들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킨 개신교인들이 오늘날 안하무인적으로 변한 모습.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라지만, 이건 마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튀는 레코드판을 보는 듯 하다. ‘남에게 내 기준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반지성주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반지성주의』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아쉬운 여운이 남았다.
원문: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