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의 양쪽 말단
과학자는 골방 연구실에 처박혀서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나, 하여튼 현대사회에서 과학자가 자신의 일을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어느 레벨의 과학자이건 결국 타인과 자신의 직업에 관련된 일을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런 커뮤니케이션은 여러 가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가령 자신이 하는 연구분야를 논문 형태로 출판할 때 거치는 피어리뷰 과정의 리뷰라든가, 학술대회에서의 학술 발표 등은 극히 한정된 대상이자 자신의 연구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소수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사실상 이런 논문, 학술 발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직업인으로서의 과학자를 기르는 트레이닝 과정에서의 주된 목표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 본연의 밥벌이’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하게 되는 데는 과학자로서의 트레이닝에 소요되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트레이닝 과정을 제대로 마친 사람이라면 과학자가 해야 하는 다양한 층위의 커뮤니케이션 중 자신의 본업 관련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제일 반대편 극단에는 직업이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 혹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사람들에게 과학을 이해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흥, 난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라도 설이라든지 추석 명절 때 친인척에게 “내가 뭐를 하면서 밥 벌어 먹고살고 있다”를 설명할 일이 가끔은 있을 것이다. 오랫만에 만난 삼촌, 큰아버지에게 “그래, 자네가 하는 일이 뭐라고 했지?”라는 물음을 듣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대중을 위한 과학 커뮤니케이션과 과학자
가끔 내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글을 보고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은 대중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이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진짜로 그런가? 사실을 말하자면 ‘Mad Scientist’라는 필명을 쓰며 ‘Secret Lab of a Mad Scientist’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자는 대중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것에 그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분명히 ‘큰 관심이 없다’고 했지 ‘대중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내가 관심이 없는 것’과 ‘중요하지 않다’는 같지 않다! 오히려 대중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관심이 없는 이유라면 그것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나는 대중에게 과학을 설명하는 일 이외에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잠깐 부연설명을 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로서의 트레이닝 과정이 높아갈수록 대중의 눈높이로 맞춘 설명을 제대로 하기는 힘들어진다. 이는 높은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인적이 드물고, 사람이 많이 사는 평지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그런 산을 올라갈수록 사람이 많은 평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깨닫기는 힘든 노릇이고 자칫 딴생각을 하다가는 천길만길 벼랑으로 떨어지기에 십상이다. 게다가 어떤 봉우리이건 먼저 올라가려는 ‘경쟁 등산가’가 붙어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물론 직업적인 과학자이자 일류 과학자임에도 대중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과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일부의 예외적인 존재이고 일반화되기 힘들다. 가령 NFL과 MLB에 동시에 뛰었던 미식축구 선수 보 잭슨(Bo Jackson)이나 디온 샌더스(Deion Sanders) 같은 별종의 사람, 혹은 MIT 수학박사 과정 진행과 NFL 선수 생활을 동시에 소화하는 존 어쉘(John Urschel)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은 소수의 아웃라이어며 이들의 사례로 이런 것이 모든 과학자에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24시간이 주어지며 그 사람이 얼마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건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즉 대중의 눈높이로 과학을 설명하려는 노력에 시간을 들인 만큼 세상의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올라가려는 노력은 그만큼 감소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과학자 중에는 이미 오를 봉우리를 다 오른 이후에 과학 커뮤니케이션 등의 활동에 치중하는 사람도 있고, 높은 봉우리를 굳이 오르는 데 집착하기보다는 적당히 낮은 산을 오르는 것을 즐기면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겸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존중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직업적인 과학자이고 지금 당장 생산력이 최상의 상태에 오른 과학자들에게 굳이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압박을 크게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마는 않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그럴 시간이 현실적으로 부족하다는 문제를 넘어서 이들은 대중에게 과학을 설명하는 데 최적의 당사자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해설자
그리하여 과학을 대중에게 해설하는 사람은 반드시 현업 과학자일 필요는 없다. 과학 저술가, 과학 저널리스트, 과학 커뮤니케이터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을 수 있겠으나 아무튼 ‘해설가’의 노릇을 하는 사람이 분명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야구 중계를 할 때 반드시 현역 선수가 나와서 중계할 필요는 없다. 이대호나 오승환이 자신이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 나와서 해설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일류 과학자에게 중학생도 알아들을 수준으로 최신 과학 연구 결과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하진 않는 것이 좋다. 중계와 해설은 이전에 선수 경력과 해설 경력이 있는 해설위원이 하면 되는 것이다. 혹은 선수 경력이 없더라도 적어도 경기에 대해서 규칙은 이해하고 있는 수준의 아나운서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전문인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있는 현업 과학자는 사실 평지의 일반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른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최신 과학 정보를 설명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며 어쩌면 특정 전공의 전문 지식에 추가적으로 더해져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특정 전공에 관해 잘 아는 것, 혹은 새로운 연구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과 이를 제대로 설명하는 재능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국 현실상 이런 ‘중간 지식 거래상’이 제대로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드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현업 과학자에게 과학 해설자의 역할을 종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업 과학자가 과학 해설자를 겸업하는 것은 과연 과학자에게 이득이 되는가? 물론 사회에 대한 봉사와 공헌의 차원에서 현업 과학자가 과학 해설자로 일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며, 바쁜 시간 쪼개서 대중에게 과학 해설을 하는 분들에게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개 이런 ‘사회봉사’ 활동은 이들의 과학자로서의 커리어에는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서를 많이 출판한들, 혹은 대중강연을 아무리 많이 한들 그 사람이 정규직 일자리를 잡거나 승진을 하는 평가에는 그닥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오히려 연구보다는 ‘딴짓’에 관심이 더 크다는 시선 등 좋지 않은 영향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더 잦다.
직업과학자가 과학해설자를 겸임하는 것은 어느 정도 크든 작든 과학자로써의 커리어 손해를 감수하면서 수행하는 희생에 가까우며, 현실적으로 이를 상쇄할 수 있는 금전적인 보상도 지금의 한국 현실에서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직업과학자들에게 ‘왜 대중에게 나서서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는가’라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영화 속의 이런 대사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굳이 희생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대중에게 과학 이야기를 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이를 취미 삼은 사람도 많이 존재한다. 실제로 자신의 시간을 내고 노력을 바치는 과학자의 대부분이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취미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직업 과학자도 대중을 위한 과학 행사에 참여했을 때 지적인 면으로 얻어가는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 당신이 뭐뭐에 대해서 잘 안다는데,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한번 썰 좀 풀어 보소’로 지식을 쪽쪽 빨아먹는 것으로 대중에 대한 과학 해설이 그치기보다는, 과학자도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다.
과학 이외의 전문 분야와 교류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든지, 이런 보상이 전제되지 않은 채 일방적인 과학 교양의 전달을 직업 과학자에게 원한다면 그런 ‘봉사’를 계속할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연애관계에서 비대칭적인 정성과 사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경험한 사람이면 대개 알고 있듯 말이다. 세상만사 대개 다 그렇지만 기브 앤 테이크다. 과학자가 자신에게 그가 알고 있는 전문지식을 설명해 줄 것을 기대하는 당신은 무엇을 그에게 줄 수 있는가?
그 중간의 커뮤니케이션
물론 과학자가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이 ‘자기와 동일한 분야를 전공하는 전공자’와 ‘과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일반인’의 두 가지 분야로 딱 구분되어 나뉘는 것은 아니다. 그사이에는 수많은 다른 층위의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며, 사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과학자는 자기와 동일한 분야를 전공하는 전공자, 자신이 쓴 논문에 대해서 피어리뷰를 할 수준의 전문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아닌 다른 과학자와도 커뮤니케이션할 경우가 빈번하게 생긴다.
- 같은 분과학문이지만 다른 주제를 하는 연구자
- 조금 다른 분과학문이지만 크게 퉁 치면 넓게 한 분야로 포함될 수 있는 학문(광의의 생명과학, 물리학, 화학 등)
- 그냥 자연과학(생명과학+물리학+화학)
- 자연과학 및 공학
- 그냥 과학(자연과학+사회과학+공학)
- 학계
- 기타 전문인, 학생
어쩌면 과학자가 직업적으로 더 중시해야 할 커뮤니케이션은 이런 중간 단계의 커뮤니케이션일 수도 있다. 자신이 근무하는 세부분과에서는 난제로 생각되던 것이 조금 다른 분야에서는 그냥 학부 4학년생이 배우는 교과서의 테크닉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이지만 분야별 교류가 부족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경우도 허다하며, 학문의 세분화에 따라서 조금만 세부분과가 달라져도 해당 분야의 소식에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진 경우 또한 허다하다. 물론 이들 모두가 과학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기본적인 트레이닝이 된 사람들이라고 전재한다면 과학자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좀 더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어느 정도 수준에서 알고 있을 것인가’에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상호 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이런 서로 다른 과학분과, 세부분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과학자의 본업에도 시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과학자가 중시해야 할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그리고 일단 과학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것보단 쉽다!
‘매사페’와 과학자 상호 간의 커뮤니케이션
2017년 1월 21일, ‘매드 사이언스 페스티벌(Mad Science Fest.)’ 약칭 ‘매사페’라는 약 빤 이름의 행사를 개최했다. 이름만 보고서는 이 행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과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 특히 과학을 즐길 수 있는 과학 덕후의 코미케(…) 비슷한 느낌의 행사로 진행하고 있다.
과학을 하는 사람에 의한, 과학을 하는 사람을 위한, 과학을 하는 사람의 행사다. 결코 일반인에게 ‘과학은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거란 기대를 주는 행사가 아니다. 물론 ‘이 행사는 과학 짬빰이 몇 년 이상 된 업계 종사자만 오는 행사임! 문외한 꺼지셈!’ 하는 이야기 또한 아님을 유의하기 바란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 과학애호가라면 주저하지 말고 오라! 여기서 실제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라! 과학저널리스트와 해설가에 의해 대중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것이 아닌 날것으로써의 과학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과학은 실제로 이렇게 진행된다는 느낌이라도 얻고 가시라!
특정 전공자만 모이는 행사가 아니라 다학제적 과학자들이 모이는 행사이기에 행사에서 진행된 이야기들은 특정 전공자만 모이는 전문학회에서 나오는 이야기보다는 일반인들이 접하기에 알아듣기 쉬울 것으로 생각한다. (각자 세부전공학회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막 던지면 우리도 일반인처럼 멘붕할 테니 적당히 쉽게 설명해야 하거든)
이 행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비교적 넓은 분야의 과학자들 간 상호교류와 친목, 그리고 분야의 장벽을 뛰어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장소는 장차 과학 해설가, 과학 커뮤니케이터 등을 꿈꾸는 과학자·과학도에게도 좋은 트레이닝 그라운드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전문지식과 그 지식의 중요성을 과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고 싶다면 일단 자신과 조금 다른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이것을 설명해 보아라! 만약 옆 방의 친구에게 자신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수많은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으리?
과학자가 가장 먼저 소통해야 할 대상
내 블로그나 ‘오마매의 바이오톡’, 혹은 매사페와 같은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자는 소통이 필요하며 그 우선 대상은 당신 주변에 있는 과학자라는 것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진 않다(이미 했잖아).
굳이 멀리서 소통의 대상을 찾지 말자.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그리고 소통을 통해서 뭔가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동료 과학자와의 소통부터 시작하자. 그것에 성공한다면 한 걸음, 한 걸음 그 범위를 넓혀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