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흥미로운 사건으로 한국 서브컬처계 및 젊은 온라인 이용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무위키의 “성 평등주의(Gender Equalism)” 항목(이 항목은 현재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으로 개명되었다)의 조작문제가 눈에 띈다. 해당 문서 및 아름드리 위키의 “이퀄리즘” 항목, 그리고 사태의 경과를 상세하게 추적하여 기술한 페미위키의 “젠더 이퀄리즘 날조 사건” 항목 등을 참고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개인적인 관심사를 담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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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여성주의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한 나무위키 이용자가 2016년 8월 초 “페미니즘보다 역차별 논란에서 좀 더 자유롭다”는 점에서 여성주의/페미니즘보다 좀 더 나은 ‘사상’인 성평등주의/젠더 이퀄리즘이 서구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퀄리즘” 항목을 만든다. 페미니즘이란 말을 밀어내는 개념이 필요하며 이퀄리즘이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디시를 포함한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전부터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가치중립적’인 지식처럼 받아들여지며 몇몇 커뮤니티의 범위를 넘어 한국의 온라인 공론장 전반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위키 사이트에 독자적인 항목으로 작성된 것은 처음이었다.
2016년 8월은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으로 촉발된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메갈리안 공격 및 이에 대한 온라인 여성주의자들의 반론이 이어졌고, 여기에 대한 정의당 문예위의 넥슨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 및 정의당의 해당 논평 철회를 둘러싼 논쟁으로 여성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반 메갈리아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던) 나무위키의 해당문서는 여러 이용자의 참여하에 급속도로 살이 붙기 시작한다. 8월 14일 r75판에서 최초 작성자가 덧붙인 문구는 이 문서의 성장이 당시의 메갈리아 및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2015년 이후 메갈리아를 비롯한 쉐미니스트, 페미나치 단체들이 페미니즘의 이름을 방패로 걸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행하는 극단적인 언행과 징병제등의 남성에 대한 성차별들에 반감을 가진 성평등을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젠더 이퀄리즘이 페미니즘을 대체할 성평등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대두되었다.
11월 1일 r141판을 작성한 기여자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하면서 이 개념이 여성주의를 겨냥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평등이면 평등이지, 평등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누군가에게 더 이권을 주는 차별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 페미니즘에서 ‘평등’이라는 말이 ‘여성이권’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점에 대한 경계다.
근본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이 억압받는 약자이므로 남성을 차별해야 평등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 기반이므로[sic](11월 7일 r145판 추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하는 성 평등주의와는 전혀 같다고 볼수 없다(같은 날 r152판 추가).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만들어진 ‘성 평등주의’는 1월 24일 페미위키 측의 매우 구체적인 반론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때까지 약 반 년간 지속적으로 증식했으며, 위키 밖의 각 온라인 게시판, 인터넷 언론의 카드뉴스, 정의당 당원 게시판 및 당원 게시 현수막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후 페미위키측의 세세한 반론으로 인해 젠더 이퀄리즘이 문서 작성자들의 믿음과 달리 ‘학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용어가 아니며 그러한 주장이 최초 작성자의 날조임이 드러나면서 이 문서는 크게 정정되어 현재의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으로 개명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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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는 이 과정이 기본적으로 반메갈리아적 입장의 형성과정과 근본적으로 유사한 논리를 따른다는 것만 짚어보고 싶다. 특히 오유 및 나무위키 등을 포함한 그룹은 메갈리아로부터 기원한 전례 없는 여성주의적 발화들을─그 발화들이 모두 설득력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마주하여 정상/비정상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즉 ‘메갈’은 사회의 정상적인 합리성을 벗어나 남성에 대한 혐오·증오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단지 여성주의적 수사를 휘두르는 ‘일베’랑 같으며, 그에 대항하는 오유 및 메갈리아 비판자들은 일베·메갈 양자와 달리 온건·합리적이며 정상적인 사회질서를 수호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이 패턴은 “성 평등주의”의 성립과 유통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이 구도에서 여성주의는 여성들만의 이권을 생각하고 남성을 차별하는, 잘해야 과거 언젠가 무언가 유의미한 역할을 한 적이 있던, 충분히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입장으로 제시된다(남초 커뮤니티에 가면 여성주의를 광기나 ‘정신병’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성 평등이 사회의 기본적인 당위로 자리 잡은 현대에 사실상 성 평등을 대변하는 거의 유일한 전통인 여성주의를 직접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은 합리와 정상성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성 평등주의”가 여성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로 제시되어 여러 남초 커뮤니티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상황을 한편으로 껄끄러운 여성주의(자)를 덜 합리적인 이들로 몰아넣으면서도 과거의 남성우월주의로 퇴행하는 대신 합리성·정상성과 남성의 권리를 점유하고픈 젊은 한국인 남성들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의 빠른 몰락과 새로운 규범으로서의 여성주의적 비판을 동시에 마주하는 젊은 한국인 남성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 일베로 표상되는 야만적·비합리적인 남성우월주의자
- 여성들과 어울리기 위해 시시콜콜한 매너와 교양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 여성들에게 굴복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보이는 페미니스트 남성
- 그리고 양극단 사이에서 현대적인 합리성을 갖추되 여성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고 목소리를 내는─정확히는 자신이 그렇다고 믿는─‘정상적’ 남성
“성 평등주의”는 세 번째 길을 선택한 남성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다른 입장, 특히 여성주의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담론적 무기로 제련되었다. 이러한 무기는 여성주의가 남성들에게 전가하는 죄의식과 책임, 즉 여성혐오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그 질서를 구성하고, 동조하고, 혜택을 보고 있는 남성들이 반성하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지닌다는 믿음을 깔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우리 모두는 평등하고 또 이미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이제 남자도 그 평등한 권리란 걸 아무 죄책감 없이 누려봐도 되지 않는가!
물론 번쩍이는 듯 보였던 칼이 알고 보니 마분지로 만든 가짜였다는 게 이 계획의 치명적인 결함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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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특히 한국사회를 보다 학적으로 관찰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이 사건을 단순히 망상과 사기, 날조의 결과물로만 결론짓고 넘어가는 대신 좀 더 유의미한 생각거리들을 끌어내고 싶다.
1) 앞서 링크한 각종 위키 항목에서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개념 및 이에 준하는 입장이 영어권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학적·일상적 용법으로 널리 채택되고 있다고 볼 근거는 현재로써는 없다. 구글 스칼라를 참고할 때 해당 용어가 등장한 최초의 사례는 2000년 8월 말, 남성잡지 《에브리맨(Everyman, 2011년 4월부터 온라인 블로그로 운영되고 있다)》에 실린 “평등주의냐 노예 상태냐? 남성들의 선택(Equalism or Slavery? Men’s choice)”이란 글이다. 현재 로그인 없이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이 글의 내용 및 해당 잡지 블로그 소개문은 남성과 여성을 위한 평등에 찬성하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만이 부당하게 강조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정확히 “성 평등주의”를 신봉하는 남성들의 입장과 일치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성 평등주의” 해당 시점부터 일관성 있는 용례를 가진 개념으로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2010년대 중반까지 검색 가능한 “gender equalism”의 용례들을 보면 어느 정도 일관적인 용법이 등장하는 시점은 약 2013-14년도쯤까지 와서이며 그마저도 일상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대학언론 듀크 크로니클에 한 학부생이 기고한 글에서 ‘남성 증오(male-hating)’적 용법으로 오염된 여성주의를 “성 평등주의”라는 말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걸로 이 용어가 공적인 용법을 획득했다고 말할 순 없다. 페미위키에서 정리해놓았듯 영문 위키피디아에 2016년 7월부터 12월 사이 egalitarianism과 equlism을 등치 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삭제되었다.
2) 아마도 영어권 온라인 커뮤니티, 특히 남초 커뮤니티의 담론생성사를 직접 살펴볼 때까지 제대로 된 역사적 서술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가설은 그려볼 수 있다. 전통적인 (우월한) 남성상과 가족중심적 삶의 복구를 추구하는 입장이든, 남성에게 ‘부당한’ 차별과 비난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든 여성주의에 대항하여 ‘평등’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언어는 적어도 2000년 초반부터 마이너하게나마 존재했으며, 비록 단일한 개념의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2010년대 중반, 특히 2013-2014년 정도를 거치면서 이러한 입장들을 대변하는 용어로 “성 평등주의”가 사용되는 빈도가 점차 늘어난다(여전히 학술적인 담론이나 공적 용법을 획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의 직접적인 반여성주의와 달리 이때의 “성 평등주의”는 자신이 여성주의의 반대자가 아니라 보다 완전한 대체항이라고 주장한다─물론 실제 이러한 담론의 용법을 살펴보면 실질적인 핵심은 남성의 위치를 어떻게든 보전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어권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의 상황을 잘 모르지만, 이른바 게이머 게이트를 포함해 여성주의에 대한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의 적대감이 증폭된 상황에서 “성 평등주의” 혹은 유사한 언어 사용이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더불어 이는 전통적인 권위의 상실과 성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적 역할 사이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한국인 남성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조작된 개념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유통된 것은 애초에 한국인 남성들 및 남초 커뮤니티의 담론지형이 이러한 언어가 쉽게 유통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즉 지금과 같은 담론지형이 유지되는 한 지금과 같은 상황은 모습을 바꾸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3) 이 사건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문서작성·기여자 및 비판자들이 사용한 수사적 전략에 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문서작성자들은 서구의 학계를 “성 평등주의”의 상상적 기원으로 삼으면서 이 단어에 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으며, 비판자들은 팩트의 축적을 통한 논리전개를 통해 응대했다.
한국인들이 서구의 학계·시민사회에 부여하는 강한 지적인 권위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고 상대방의 논지를 공격하는 것은 특히 온라인 여성주의자들이 영어권 여성주의 자료를 활용하여 여성혐오·성차별을 옹호/정당화하는 한국 남성들을 무력화시킬 때 주로 사용된 방법 중 하나였다(그런 점에서 2010년대 한국 온라인 여성주의의 발흥은 미국 여성주의 담론의 폭발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역으로 여성주의자들을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논자들로 표상해왔던 한국 남성들은 특히 팩트에 기초한 논변을 통해 전자를 제압하고자 하는 수사적 전략을 종종 활용해왔다.
이번 사건은 두 진영이 논쟁에서 서로의 수사적 전략을 차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반여성주의적 논자들은 서구 학술장이라는 권위를 (거짓되게나마)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했으며, 역으로 특히 페미위키의 이용자들은 강력한 팩트 축적을 통해 “성 평등주의”의 비합리적인 주장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일회적인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후에 여성주의와 한국 남성을 둘러싼 논쟁들이 지금보다 훨씬 복잡하게 변모하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온라인 커뮤니티 여성시대의 SLR클럽 침투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2015년 이전까지 한국의 온라인 공간은 서로 다른 관심사에 의해 형성되었고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복수의 커뮤니티들로 구성되었다. 메갈리아와 온라인 여성주의자들의 출현에서 진짜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미러링”이라는 개념을 동원해 자신들의 공격적인 발언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성혐오”라는 키워드를 통해 커뮤니티들 사이의 상호 불간섭을 넘어 문제적인 발언과 문화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비판하는 걸 일상적인 행동양식으로 채택했고, 결과적으로 커뮤니티를 넘나드는 남성문화/여성문화 사이의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메갈리아의 붕괴 이후 온라인 여성주의자들의 결집력이 하락하고 이러한 충돌 혹은 접촉이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남초적 언어와 여초적 언어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대규모 SNS를 제외하고는) 다시금 별개의 문화로 분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이한 성향의 이용자들이 위키를 두고 편집전쟁에 돌입하는 전개는 국지적으로나마 두 언어의 충돌 가능성을 제고한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들의 언어를, 그리고 새롭게 온라인 공간에 진입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어떻게 형성할지는 이후의 전개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