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독자적인 ‘종(species)’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그중 관찰과 사색을 통해 뭔가를 꾸며내는 능력과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은 이를 ‘한가한 호기심(idle curiosity) 본능’과 ‘제작본능(workmanship)’으로 명명했는데, 이를 통해 예술과 문학은 물론 과학과 기술이 발전했다.
수천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던 인간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도 19세기 들어 등장한 과학과 기술의 덕분이다. 시간에 따른 소득변화추이를 그래프에 옮겨보면 AD 1년부터 18세기까지 그래프의 기울기는 수평선을 그리며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세기 초반부터 그래프의 기울기는 급속히 가팔라진다.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래프의 기울기는 거의 수직에 가까워지는데, 그것은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는 과학기술의 속도 때문이다. 예컨대 1980년대까지만해도 개발된 후 5년 정도 생존을 보장받던 신기술과 신제품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1년을 겨우 보장받는다. 스마트폰의 수명은 2년 이하다. ‘제품’은 멀쩡하나 그 ‘기술’이 수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제품은 기술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제품만 과학과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제도’의 변화 속도는 더 느리다. 세계화로 인해 자본은 전광석화처럼 수십만 킬로를 이동하지만 그것을 통제해 세금을 매길 제도는 항상 뒷북 친다. 드론이 머리 위를 휙휙 날라 다니지만 그것들을 통제할 교통제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는다. 자율자동차의 경우도 그러하리라.
제도보다 더 느리게 과학기술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변화 속도가 가장 느린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행동은 문화의 지도를 받아 촉발된다. 문화는 오랜 세월을 거쳐 습관화된 사유방식과 태도다.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이기보다 과거지향적이다. 습관으로 되어 굳어진 문화는 변화를 거부한다. 문화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게 만드는 반면 새로운 것을 조롱하게 만든다.
이처럼 문화는 인간의 변화 속도를 지연시키는 첫째 요인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변화에 대한 적응을 방해하는 문화의 효과는 커진다. 더 확실하게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노인들을 완고하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이런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다음과 같은 인간의 속성 때문에도 인간은 과학기술의 변화 속도를 가장 늦게 따라잡는다. 물질(제품), 제도와 달리 인간은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음 그 자체는 경이로움이지만 ‘유한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과 바람에 비해 생물의 변화 속도는 현저히 느리다. 호모사피엔스는 그 중 가장 느리다. 가장 빠른 인간 우사인 볼트도 100미터를 10초 안에 겨우 주파할 뿐이다. 그것도 가장 건강한 청년기에만 가능하다. 장년을 거쳐 노년기에 들면 우사인 볼트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질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영양섭취의 양과 질이 늘어나고 의료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건강상태는 급속도로 개선되지 않는다. 물론 100년 전에 비해 생물학적 기능과 수명은 연장되었다. 하지만 ‘생물학적 기능과 수명이 연장되는 것’과 ‘과학기술의 급속한 변화를 따라잡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건강하다고해서 과학기술 및 지식의 변화에 반드시 잘 적응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문화적 관성, 곧 과거에 구속되어 있는 사유방식과 태도가 가세되면 양자의 관련성은 더 작아진다. ‘건강한 꼰대’! 그게 우리가 보는 것의 전부다.
실제로 들여다보면 건강의 허수도 작지 않다. 건강수명이 10년 연장되었다하더라도 그 정도 건강으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노안은 피할 수 없다. 5시간 이상을 집중해 일하기도 쉽지 않다. 육체노동만 그렇지 않다. 정신노동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강의수를 줄여야 하며 ‘열강’은 흘러간 낭만일 뿐이다. 또한 2년 전부터 논문을 쓰지 못한다. 논문은 집중적인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런 잡글로 때운다. 그런데 이것도 요즘엔 많이 거른다. 근거 있으면서 흥미로운 글을 쓰자면 새로운 논문을 읽어 변화하는 지식을 따라잡아야 하는데 눈이 아프고 허리도 아파 그렇게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잡글 쓰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어떤 시대보다 과학기술은 빨리 변한다. 과학기술뿐 아니라 경제학의 변화 속도도 그렇다. 그러하니 힘들여 획득해 놓은 이전의 지식은 쓸모없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유물에 집착한다.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개선되자 요즘 이 문화적 존재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 건강이 개선되었으니 자기도 새로운 과학기술, 새로운 제도를 따라 잡을 수 있으며, 그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대를 지도할 수 있다고 오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문화적 존재일 뿐 아니라 불가피하게 노화되는 생물일 뿐이다. 건강한 꼰대 이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어디로 가나 ‘건강한 꼰대’가 득실거린다. 돈으로 가오 잡고, 권력에 의지해 안하무인이다. 잔소리도 많고, 목소리도 높다. 이제 좀 들어가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서든 얼굴을 내민다. 젊은 세대가 설 자리가 없을 정도다. 그 나이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꼴불견이다. 세상의 색깔이 안 나고 그림도 아름답지 않다. 나는 건강한 꼰대보다 ‘열린 젊음’의 예쁘고 역동적인 세계를 더 보고 싶다.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시대를 넘겨주는 게 마땅하다.
표창원 의원이 정치인의 정년을 65세로 제한하자고 했다. 실제로 나는 그보다 먼저 이 글을 쓰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정치분야에만 국한하면 안 된다. 나는 모든 영역에서 65세 정년을 두기를 주장한다. 변호사도, 의사도, 교수도, 기술자도, 사장도, ‘빵빵한’ 직종 몽땅 말이다.
경험과 연륜을 썩일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경험과 연륜이 약발을 받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모든 지식이 급속도로 변하는 지식기반사회에서 경험과 연륜은 오히려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입만 살아있는 산업화세대가 컴퓨터공학에 기초하는 빅데이터 시대를 지도할 수 없다!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과 지혜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그보다 훨씬 우수한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지혜로운 철인’ 없어도 세상 잘 돌아가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서울 어느 대학에선 교수정년을 70세로 연장했단다. 그 학교 학생들은 이제 망했다. 꼰대들의 흘러간 옛노래와 접설을 듣고 빅데이터 시대에 들어서야 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노욕 때문에 젊은이들의 인생을 망치는 자들이여, 화 있을진저!
지금 퇴직하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내가 65세 정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분야는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빵 영역이다.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꼰대짓’을 한다.
건강한 꼰대들이 너무 많다. 이 꼴불견들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 일할 자리도 없다. SNS 공간도 이 꼰대들이 이미 점령해 버렸다.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 65세 되면 의자를 넘겨주자. 이제 고마 해라! 이 말은 반기문, 김종인, 김기춘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