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196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중령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다.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1961년에 공개재판을 받았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은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자기변호를 했지만 1962년에 사형당했다.
그 재판 과정을 지켜본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이 관료 체제 안에서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 채 시키는 대로 일한 평범한 관료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라는 책을 통해 그 평범함이 언제든지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렌트의 의견은 당장 반론을 끌어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평범한 관료인 듯이 굴었을 뿐, 실제로 신념에 의해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역사가나 저널리스트가 아닌 철학자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위계질서를 갖춘 체제 안에서 사람들, 즉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 체제에 순응하고 동참하는지, 그런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의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순실과 부역자들
근래 한국에서 벌어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우리는 여러 아이히만을 만났다. 공직사회라는 전형적인 관료체제 안에서, 혹은 관료는 아니지만 관료체제에 개입하여 국정 농단에 참여한 ‘최순실 사태의 부역자’가 그들이다.
국가의 정책 운영을 엉망으로 만든 그들은 사실을 발각 당한 뒤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달아나거나 숨어버린 자들도 있고,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겁먹은 눈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실토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 중에서 자신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며 발을 빼는 자들이 아이히만에 가깝다.
한나 아렌트가 평가한 아이히만처럼 그들도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까? 상명하복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관료체제의 위계질서 안에서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기획 단계가 아닌, 단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나 지시의 지엽적인 부분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일의 맥락을 잘 알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했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국정농단을 유발한 여러 일의 기획 단계에 몸을 담고 있었던 자들은 그렇지 않다. 일의 실체를 알고 있었으므로 선악 여부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고의 교육과 사회적 경험으로 무장한 그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사리분별을 못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루돌프 아이히만에게 내린 평가처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부역자들을 제도에 순응해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 평범한 관료라고 판단하기엔 어렵다. 이제 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발을 빼는 것으로는 설득이 안 된다. 잘못된 일인지 알았다면 애초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최순실 사태의 부역자들은 지금 그 최선을 선택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그들에게 압력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상명하복이 일상인 관료체제에서는 상부의 명령이나 지시를 쉽게 거부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쁜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는 측면도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이 나쁜 선택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게다가 옳지 않은 일에 가담했음이 사실로 밝혀진 마당에서는 책임을 피할 수도 없다. 다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을 자기변호의 수단으로 삼는 데에 구조적인 원인이 있지 않는가 추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의 이중성과 압박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선택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마냥 얻기만 하는 선택이란 없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는데 그것이 비윤리적이거나, 위법하거나, 양심에 어긋날 때도 선택의 메카니즘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옳지 않은 일이므로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면 상부로부터 보복을 당할 공산이 크다. 양심을 지킬 수는 있지만 지위, 권력, 재화(급여) 따위를 잃기 쉬운 것이다.
반면에 명령과 지시에 따르는 선택을 하면 양심을 저버리는 대신 자리는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협조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고 하기는 참 어렵다. 상하의 구분이 명확하고 상명하복이 일상화된 공직사회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직장만 해도 그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자리를 받기로 하고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한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처럼 말이다. 잃는 것이 두려워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에 가담했다면 더 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잃는 것이 두려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부역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의 여지가 있다. 양심과 윤리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상부가 하부의 목을 조일 수 있는 현실의 조직체계에서는 입바른 소리가 되고 만다. 내부고발자(공익제보자)들이 어떤 식으로 보복당하는지 뻔히 알면서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양심이야 평생 간다 해도 먹을 것이 없어 내일모레 죽으면 그 양심이 무슨 소용인가.
선한 선택의 비현실성
부역자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죄는 감정이 아니라 법에 의해 다스려질 것이다. 어쩔 수 있었든지 없었든지 간에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이런 일을 근절하기는 어렵다. 사회의 규칙은 나쁜 짓을 했을 때 벌을 주도록 되어 있다. 나쁜 짓을 했다가 발각이 되면 잃게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쉽게 나쁜 짓을 하려 들지 않는 효과를 낸다.
문제는 선한 선택을 했을 때도 잃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나쁜 짓을 들켜서 벌을 받으나, 지금 양심 윤리 타령하다가 현실적 곤궁에 빠지거나 인생 망가지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 두 눈 질끈 감고 나쁜 짓을 못 본 채 하거나 소극적으로 가담하기 십상이다. 선을 선택하면 손해, 악을 선택하면 들키지 않았을 때 이익, 들키면 손해인 상황에서는 악을 선택하고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현실의 합리성일 수밖에 없다.
나쁜 선택에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한 만큼 선한 선택에도 보상이 있어야 한다. 선을 택해서 얻는 것이 있거나, 최소한 선을 택했을 때 잃는 것이 없어야 선도 하나의 선택지로서 가치가 있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한 청문회에 나온 조여옥 대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여옥 대위가 악을 선택해도 얻을 것은 별로 없다. 입을 잘 다문 덕에 별을 달거나 훈장을 받을 리도 없다. 하지만 양심에 기대서 진실을 말한다면 그의 군 생활은 끝이다. 삶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뜻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할 거대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양심에 따라 선을 선택해도 삶이 무너지지 않아야 하며 보복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용기를 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지금 사회는 양심에 따라 선택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한다. 선한 선택을 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면 그 사회의 토대가 선함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분위기와 환경에서 개인의 양심에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사흘 굶고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양심은 물리적인 현실 앞에서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양심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안전망이 없다면 양심은 한낱 미사여구에 그칠 뿐이다. 양심이 사라진 세상이라 한탄하지만 말고 양심에 따르기 쉬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악이 평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선이 더욱 평범해져야 할 뿐이다.
원문: 마흔하나, 생각을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