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부흥’이라는 명분 아래 더 커다란 교회, 더 많은 교인 수,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돈을 추구하고 정당화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주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나도 대학생 시절에 ‘부흥’과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설렜던 기억이 있다. “이 땅에 부흥을 주시옵소서!”라고 눈물 흘리며 뜨겁게 기도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20여 년을 지나오며 선교 단체든 교회든,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게 되면서 커지고, 높아지고, 부유해지고, 강해지는 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소위 커지고 높아지고 부유해지고 강해진 크리스천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교회가 욕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 사회의 불의, 구조적 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감고 외면하면서 도리어 악의 구조에 편승해 가해자와 악의 주체를 편드는 모습을 보여 줬다. 이런 한국교회 모습에 비신앙인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인조차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모습은 사람들 기대와 달리 ‘고통당하는 이웃’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자기들만의 안락함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깨닫게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앙관으로 유명해지고, 커지고, 화려해지기만 하다면 (그 과정에서 어떠한 부도덕과 비윤리가 자행되어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덮고 무시할 수 있다는 위험하고 천박한 생각이 교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
성경을 꼼꼼히 읽어 본다면 하나님은 그런 것들로 영광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바로 인간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메시아, 예수의 탄생과 삶의 스토리다. 크고 높고 화려한 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는 이 땅에 태어났다. 심지어 출산 당시 여관조차 구할 수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야 했다.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아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예언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이사야 53:1-5(새번역)
이사야가 예언했듯 이 땅에서 예수의 삶은 철저히 작아졌고 낮아졌고 약해졌고 가난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따른다는 한국교회는 커지고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찾으려 한다. 수천억 원의 돈을 들여서 큰 교회 건물을 짓고는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하던 교회의 모습처럼 말이다.
한국교회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많은 분석 글이 있다.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타락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천박하고 그릇된 욕망’을 성경까지 들먹이며 ‘종교적으로 능수능란하게 포장’하는 법을 터득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잘 쓰임 받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커지고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려는’ 욕망에 세례를 주고, 간증하며, ‘신앙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쉽고 복된 것인지 열심히 전파했을 때부터 한국교회는 예견된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게 아닐까?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작아지고, 낮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지러 오셨고 끝내 죽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런 예수를 따르며 닮고 싶다고 고백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어떤 삶을 추구하며 살았는가? 온갖 비상식적인 불의와 악이 자행되고, 어이없는 국정 농단과 온갖 비리가 파헤쳐지는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 중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아르바이트생과 노동자의 임금을 온갖 꼼수로 체불한 게 들통난 기업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이다.
어쩌면 진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생각처럼 ‘커지고 강해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낮아져 내려오셔서 보잘것없는 인간들, 못난 제자들, 병들고 고통받던 백성들을 끝까지 섬기다가 억울하게 죽어 가셨던 것처럼 ‘작아지고 약해지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찌질하고 약하고 거짓말 잘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인간들을 끈질기게 사랑하다가 끝내는 자기 아들까지 보내셨다. 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인간들을 사랑한 성경 속 하나님의 이야기는 끝없이 ‘약해지고 작아지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삶의 모습이라는 교훈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삶의 여정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커지고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작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화려한 교회, 세련된 프로그램, 북적대는 교인들이 있는 소위 ‘유명한 큰 교회’ 목사들의 온갖 범죄와 부패, 거짓말에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았다면,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현장의 이웃을 기억하고 함께하며 ‘작아지고 낮아지려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모습, 낯익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2,000년 전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화려한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어느 더럽고 냄새나는 마구간에 임했던 것처럼.
원문: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