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8일, 미국에서는 제74회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시상식이 열렸다. 한국 매체에서도 주목했고 작년 연말부터 관객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라라랜드>가 역시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다. 7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모두 수상을 했다. 이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역사상 최다 부문을 수상한 것이다. (참고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벤허>, <타이타닉>,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11개 부문으로 공동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골든 글로브는 TV와 영화를 나눠서 시상하고, 영화도 드라마 부문과 뮤지컬·코미디 부문으로 나눠서 상을 준다. 그래서 장르에 대한 구분이 없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비해 상이 주는 무게감은 좀 떨어지긴 하나,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는 트로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재미있는 잔치로 봐도 충분할 것이다. 특히 골든 글로브는 보통 아카데미 시상식 한 달 전에 열려 영화 시상식의 전초전으로서 아카데미 수상 여부를 가늠케 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시상식의 무게감을 떠나 골든 글로브, 아카데미, 그래미 같은 시상식은 그 자체로 스토리를 가지기에 한 편의 쇼로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 시상식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이 점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누구보다 빛났던 배우, 메릴 스트립
올해 골든 글로브의 주인공은 단연 <라라랜드>였지만, 그보다 더 빛이 났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공로상 수상자 메릴 스트립이다. 언젠가는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제는 진정한 대배우의 반열에 오른 듯하다. 배우라면 평생 한 번 노미네이트만 되어도 영광이라는 아카데미에서 그녀는 무려 16번이나 노미네이트 되었고, 2번이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골든 글로브에서는 25번 노미네이트에 7번 수상.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이쯤에서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을 담은 아래의 5분 40초짜리 영상을 보길 먼저 추천한다. 내가 본 수상 소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소감이라 말하고 싶다.
좋은 글과 말의 조건
“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고민해본 문제일 것이다. 여러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이럴 때 보통 많이 언급되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다.
수사학이란 간단하게는 말을 잘하는 방법과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미 기원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The Art of Rhetoric)』이란 제목으로 정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크게 세 가지 개념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로고스(Logos)다. ‘논리’를 뜻하는 말로서 logic이란 단어의 기원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증거와 함께 말에 논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언종은 진짜 멋진 놈인 거 같아!”라는 말을 뒷받침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가 없으면 상대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 에토스(Ethos)다. ‘성격’, ‘관습’을 의미하는 말로, 후에 윤리학(Ethics)으로 발전된다. 수사학에서의 에토스는 말을 하는 사람의 성격으로부터 출발해 그 사람 자체의 호감과 매력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의미한다. 즉 에토스가 뛰어나다면 지금 나를 설득하려는 화자가 논리력은 좀 부족해 보여도 기분 좋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상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수사학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에토스의 사례는 연예인을 향한 팬심, 회의하지 않는 맹신적인 종교에서 잘 드러난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지지 역시 이 에토스에서 그 동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에토스가 가장 강력한 사람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유재석과 손석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여하튼 에토스는 쉽게 그 사람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라 받아들이자.
세 번째는 파토스(Pathos)다. 이는 설득 당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에 대한 개념이다. 로고스가 이성적인 부분이라면, 파토스는 감성을 담당한다. 흔히 ‘페이소스’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중무장된 논리와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도 필요하지만, 결정적일 때 감정을 건드리는 파토스의 힘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파토스만 가지고는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이 인상 깊은 이유
메릴 스트립은 수상 소감을 위해 무대에 올라 우선 세 단어를 언급했다. Hollywood, Foreign, Press. 세 단어를 키워드로 소감문 전체를 끌고 가겠다는 공지였다. 우선 저 세 단어의 선택은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할리우드 외신 기자협회(Hollywood Foreign Press)’에서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점을 안다면 또 하나의 센스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시상식에 참여한 수많은 다국적 후배들의 출신지를 하나하나 언급하며 “할리우드(Hollywood)는 이렇게 다양한 외국인(Foreign)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다!”란 이야기를 한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그 짧은 시간의 지분을 혼자 다 가져가도 되는데, 그녀를 롤모델로 삼는 수많은 후배들이 한 명씩 조명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카리스마 있는 선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이는 자연스럽게 트럼프의 이주 노동자 반대 정책에 대한 비판이 되었다.
이어 트럼프의 장애인 기자에 대한 조롱도 언급하며 잘못된 권력의 사용을 비판했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낳는 사회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언론(Press)의 바른 역할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배우로서 본인이 누려왔던 특권과 함께 지녀온 책임감을 후배들이 함께 알았으면 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본인이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지지 않은가. 마지막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 캐리 피셔에 대한 추모도 담았다.
6분이 안 되는 그녀의 이야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수사학의 3요소가 모두 담겨있다. 세 가지 요소가 갖춰졌는데 설득이 안 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할리우드를 지키며 항상 최고의 여배우의 자리에 있었고, 별다른 구설수도 없었다. 수많은 후배들이 롤모델로서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 분야의 최고 실력자와 그 사람이 가진 선한 인상과 편안한 목소리. 일단 그녀에겐 에토스가 있다.
그녀가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공로상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트럼프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직장과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위협을 느끼는 개인으로서 다가오는 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기에 목소리를 냈을 테다. 단순한 비판이 아닌, 지금 할리우드가 누리는 영광의 배경에는 수많은 후배들의 다양한 출신지와 언론의 역할이 있었음을 근거로 제시했다. 로고스가 있었다.
장애인 기자에게 행해졌던 조롱과 부당한 대우를 언급하며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던 그녀의 이야기 속에선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는 수많은 약자들의 공감이 일어날 수 있었다. 또 먼저 세상을 떠난 소중한 동료를 추모하며, 동료의 말을 인용하며 소감을 마무리 지었다. 두 부분을 이야기할 땐 슬픔을 억누르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파토스를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연기는 당연하거니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메시지를 탄탄하게 전달한 메릴 스트립.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의 구성원으로서 ‘대배우의 품격’이 아닐까?
나는 그녀의 수상 소감에서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그 잔향이 강한가 생각해봤고, 이렇게 정리를 해봤다. 조금이나마 내 생각이 전달되었길 바란다. 무엇보다 말을 잘하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위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해 한 번쯤은 고려해봤으면 좋겠다.
원문: 고덴의 영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