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만물은 자신의 무게와 부피를 줄여야 한다. 동물은 겨울잠으로 활동을 줄이고, 식물은 잎과 가지를 털어냄으로써 필수영양분의 소비를 줄인다. 당근과 배추는 아직 내게 신선한 먹거리를 선물하고 있지만 겨울이라 가을까지도 푸르던 우리 집 텃밭은 이제 황량하다.
제품, 상품, 쓰레기, 선물의 구분
대지 스스로는 온전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나의 노동이 추가되어야 먹을 만한 것들이 비로소 산출된다. 그런 점에서 그것들은 제작품, 곧 ‘제품'(product)이다.
만일 내가 텃밭의 채소, 곧 제품을 친구에게 돈을 주고 팔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상품'(commodity)으로 된다. 상품은 독일어로 바레(Ware)라고 한다. 상품의 특징은 제품에 가격(P)이 붙은 것이다. 이때 상품의 가격은 0보다 크다(P>0).
이제 내 채소가 썩어버려 ‘쓰레기’로 처리할 경우, 처리비용이 들어간다. 돈을 주면서 남에게 넘겨야 하니 제품의 가격은 0보다 작다(P<0). 하지만 친척이나 지인이 방문할 때 나는 그것을 그냥 건네준다. 이때 제품은 ‘선물'(present)이 된다. 가격은 0이다(P=0).
시장, 상품, 가격, 돈
시장이란 무엇인가? 내가 텃밭에서 가꾼 제품(product)이 상품(commodity)으로 거래되는 장소나 제도다. 상품에는 0보다 큰 가격이 붙으니, 돈 안 주면 절대 양도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돈 안 되면 제작되지 않는 게 상품이다. 나아가 똑같이 돈 안 되면 형성되지 않는 곳이 시장이다. 시장은 돈으로 출발해 돈으로 끝난다. 돈이 목적이다!
유년시절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누가 빠른 속도로 암송할 수 있느냐를 두고 시합하곤 했다. 빨리 외느라 막판엔 혀가 얼얼하고 숨이 차 오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영롱하신 그분의 존엄성과 영도력만 배웠다. 그리고 독재가 가장 효율적이며 적절한 정치체제라고도 배웠다. 나아가 경제성장과 조국 근대화의 역사적 사명 앞에서 무력과 폭력은 항상 정당화되었다.
‘평등’과 ‘사회’는 가장 불온한 언어였고, ‘민주주의’란 배부른 놈들이나 하는 몽환적 언어일 뿐이었다. 학교는 물론 대중매체마저 그러하니 온 사회가 보수꼴통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진보’를 말할 수 없던 시절이다. 나아가 진보를 입에 올리면 가차 없이 처단해 버리니, 사람들은 진보를 두려워하였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며 개인에게 해를 끼치기만 하니 사람들은 급기야 진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진보적 언어와 시장
시장은 진보적 언어를 공급하지 않았다. 언어시장에 대한 진입이 차단되었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시장의 소비자 중 아무도 대가, 곧 가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보적 언어는 ‘쓰레기’와 같았다. 가격은 0보다 작았다. 시장은 진보적 언어의 공급에 실패하였다. 왜 그런가? 자신에게 상업적 이윤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보수는 성공과 이익을 보장하였다. 보수적 언어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폭등하였다. 그러자 너도나도 보수언어의 공급자로 변신하였다. 시장(market)은 진보적 언어 대신 성공, 이윤, 경쟁, 기회주의, 무관심, 무자비, 차이 등 차가운 보수의 언어를 공급했다. 독재정권은 보수적 언어의 시장을 육성하고 보호하였다. 시장적 주체들은 보수적 언어를 ‘자유롭게’ 공급했다. 진보적 언어와 경쟁할 필요가 없는 ‘독점시장’에서 보수적 언어의 공급자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자유, 평등, 연대, 박애, 인권, 민주와 같은 진보적 언어들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다. 이것 없이 인간적 삶은 달성될 수 없다. 시장이 공급에 실패한 이 언어들은 ‘비시장적’ 주체들에게 맡겨졌다. 대학생, 기자, 작가 등 1970-1980년대 지식인들이다. 많은 시장수요자가 이를 외면하고 조롱하였다. 언어시장에 대한 독점적 장벽은 강화되었다. 이 공급자들은 갇히고, 생활터전 마저 잃었다. 시장에서 퇴출당하자 시장 밖에서 그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하였다.
하지만 엄혹할 뿐 아니라 돈 마저 안 되어 희망조차 없어 보이는 이 환경에서도 이들은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고 진보적 언어에 대한 공급을 중단하지 않았다. 살인마 전두환 정권 아래서도 이들은 진보적 언어를 공급하였다. 상업적 이윤 동기와 무관하게 ‘시장 밖에서’ 그것을 공급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자. 덕분에 시장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이 언어에 내재해 있는 고품질의 ‘진보적 가치’를 점차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고귀한 ‘선물’이었다!
진보적 언어 시장의 형성
1987년 6월 항쟁으로 독재정권이 물러났다. 진보적 언어의 수요자들도 소비의 자유를 되찾았다. 진보적 언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수요자들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진보적 언어에 대한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진보가 상품화되다! 엄혹한 세월을 견뎌 온 진보적 언어의 공급자들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988년 5월 15일 이들은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였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갹출해 창간된 ‘국민주 신문’인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시장을 통해, 시장 안에서 먹고 살게 된 것이다.
진보적 언어에 대한 시장이 형성되자, 공급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화그릅 아래서 보수적 언어를 공급하던 경향신문이 1998년 한화그룹에서 독립하여 진보언론으로 변신하였다. 사원들이 회사 전체 주식의 96%를 보유하고 있는 사원 주주 회사다. 그게 얼마나 시대정신에 부합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요즘 경향신문은 한겨레보다 더 ‘진보적’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는 격이다.
2011년 이명박 정부는 보수적 신문에게 방송진출을 허용하였다. 조선일보는 TV조선을, 동아일보는 채널 A, 중앙일보는 JTBC 등 종합편성채널(종편)을 개국하였다. 시장을 두고 종편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보수적 언어를 공급하기엔 시장이 너무 좁다, TV조선은 보수 골통 수요자를 목표로 삼았다. 채널 A도 별도리 없이 왔던 길을 그대로 걷고자 작정했다.
하지만 JTBC는 ‘혁신’을 감행했다. 우리나라에 진보적 언어의 수요자는 적지 않다. 자유롭게 공급될 수 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이 이미 길을 닦아 놓았다. 그렇다. 진보가 돈이 된다! 손석희를 영입해 진보적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탁월한 경영능력과 강력한 재정적 뒷받침, 그리고 활자에서 영상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맞이하여 진보의 상품화는 성공을 거두었다.
진보적 언어 시장의 한겨레
한겨레, 경향, JTBC 모두 진보적 언어를 공급한다. 공급자가 많아지니 매우 기쁘다. 나는 이 세 가지 매체를 모두 좋아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겨레에 대한 내 마음은 특별하다. 한겨레가 내게 뭘 안겨주는 것도 없다. 한 매체에 ‘올인’하는 건, 교수들에게 여러모로 불리하다. 더구나 여느 중앙일간지와 마찬가지로 한겨레 역시 ‘지방’을 무시한다. 지방대 출신, 지방대 교수를 입에 올리거나 언급하는 걸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JTBC 못지않다.
그럼에도 내가 한겨레에 마음이 더 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진보가 상품이 되지 않고 시장도 형성되지 않아, 밥을 굶을 때도 굴하지 않고 진보적 언어를 ‘선물’로 공급해 준 유일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돈이 안 될 때도 진보적 언어의 생산을 중단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대단히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나는 경향과 JTBC로부터 이런 고귀함을 기대할 수 없고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겨레와 달리 이들은 돈이 되기 때문에 진보를 상품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돈이 안 되어도 이들이 진보적 언어를 공급할지 나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이들로부터 요구할 필요도 없다. 돈에서 시작했으니 돈으로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더 이상 돈이 안 된다면, JTBC와 삼성은 손석희를 당장 해고하고 전원책 변호사를 그 자리에 앉힐 것이다.
신문시장이 악화되면서 한겨레가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최순실 게이트로 삼성이 면모를 쇄신하고자 모든 신문에 고액의 광고를 발주했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은 그 광고를 거부했다.
한겨레는 이날 삼성광고 대신 1·3·4·5·6면에 걸쳐 ‘강남 땅 투기·삼성공화국·노동탄압·지역주의’의 근원이 박정희 정권에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돈 안 되는 짓만 골라서 한다. 눈물이 난다.
다음 기사도 보자.
독자와 시민들의 자발적 응원에서 시작된 〈한겨레〉 주주 가입 운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신문사 주주센터는 지난달 16일부터 지난 23일까지 새 주주와 기존 주주 총 1,088명이 3억8,067만 5,000원을 냈다고 집계했다. 지난 한 주 사이(19-23일)엔 250명이 1억 660만 5,000원을 냈다. 하루 평균 50명, 2,132만 원이다.
주주 가입 운동은 지난 9월 20일 〈한겨레〉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정황을 단독 보도하면서 촉발되었다. 이후 ‘한겨레’는 거의 매일 이와 관련한 단독보도를 쏟아내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을 주도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에 대한 자발적 구독신청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이미 매체를 구독 중인 이들 사이에서 ‘권력 눈치를 보지 않는 한겨레에 힘을 실어줄 다른 방법이 없느냐’는 문의가 오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의 주식을 얼마큼 샀다. 추운 겨울을 넘기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돈에 좌우되는 ‘시장’에서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치 있는 ‘선물’을 주는 신문으로 남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후원하고 보답하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장과 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선물을 줄 수도 있다. 지못미’ 이딴 소리 그만 하고, 있을 때 잘 하자!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