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분야에서 해당 분야의 ‘경력’이 일정 기간 있다는 것은 없는 것에 비해 플러스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 반대인 경우(즉, 해당 분야의 경력이 ‘일반적으로’ 손실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정치 영역에서 그렇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기존 정치인’을 싸잡아 ‘구태정치’, ‘부정부패 세력’,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정치경력이 짧을수록 이 레토릭은 잘 먹히고, 정치적 경쟁에서 잘 써먹은 무기가 됐다. 정치혐오에 기대어 정치를 하는 아이러니가 수없이 반복되어 온 것이다. 심지어 꽤 오랜 기간 정치를 해온 사람도 상대적인 정치신인임을 근거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 이 상황에서 ‘좀 더 긴 정치경력’은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런데 정치인 일반을 향해, ‘구태다, 부패다’라고 공격하고 나아가 ‘따라서 내가 대안이다.’라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첫째, 정치인들은 정말로 대다수가 부패/구태여야 한다. 둘째, 그 주장을 하는 ‘정치신인’은 적어도 정치인보다는 구태/부패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전자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후자에는 더욱 강하게 동의할 수 없다.
‘정치인 일반이 우리 사회 일반보다 과연 더 부패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평균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 특별히 더러운 자들의 집합이라서라기보다는 ‘권력’을 다루는 직업의 특성상 부패할 ‘여지’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작년까지 대학원생이었고, 올해는 시간제 강의노동자 겸 임시직 연구용역노동자로 한 해를 맞이할 예정인 나에게 누군가가 ‘내가 OO 만원을 드릴 테니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해주시오.’하고 할 리는 없다. 그러나 국회의원에게 접근해서 비슷한 제안을 할 만한 사람은 널렸다.
따라서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과 일반적인 정치인의 평균적인 도덕관념에 유의한 차이가 없더라도 후자가 타락할 ‘기회’가 더 많다. 그리고 일단 타락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사람의 도덕관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사회 일반보다 정치인이 더욱 타락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개별 정치인이 타락했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집단의 경향을 그 집단 내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생태학적 오류라고 한다. 이는 분석단위의 혼동에서 나타나는 잘못이다. 설사 어느 집단이 평균적으로 더 타락한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집단 내 개개인에게 그 판단을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는 이야기다.
이 분석단위 문제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기득권 정치인 집단’이 평균적으로 ‘사회 일반’보다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기득권 정치인을 공격하는 이들의 집단이 ‘사회 일반’에 해당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기득권 정치인’ 프레임을 사용하는 정치신인은 적어도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 대선후보 등 정치 데뷔 시부터 상당히 높은 지위를 움켜쥔 이들인 경우가 많다.
알다시피 아무나 이런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의 분야(그게 법조계든, 기업이든, 시민운동이든 간에)에서 상당한 명망과 성공을 움켜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들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다. 적어도 본인의 원래 분야에서. 그리고 그 기득권적 지위를 바탕으로 높은 위치로 정치에 데뷔한 것이다.
즉, 이들을 ‘사회 일반’이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은 그 나름의 지위에 따르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로비를 하거나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정치인 일반이 우리 사회 일반보다 더 부패했을 수 있다는 앞 단락의 논증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립한다. (나는 애초에 이런 논증이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논증을 긍정한다면 그렇다)
물론 정치적으로 인기를 얻은 이들은 그들이 속한 분야의 기득권을 가진 이들 일반과 달리 개인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주장은 정치인 집단에 대해서도 성립할 수 있음을 앞서 분석단위 문제에서 설명한 바 있다. ‘정치에 충원된 신진세력은 해당 집단 내에서 특별히 부패하지 않았다는 평판을 가진 이들이지, 해당 집단에서 임의로 추출된 사람이 아니므로 이 경우는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만약 이 말을 긍정한다면 정치인을 비판할 때도 ‘일반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다는 평판을 가진 정치인’을 신중하게 제외하고 부패, 구태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여지껏 정치혐오에 기댄 정치인이 이런 신중함을 보인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가 많다.
OOO은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치인 일반이 부패했으므로 그도 부패했다.
이런 식의 주장을 우리는 흔히 접한다. (사실 부패했다는 평판이 자자한 정치인을 비판하는데 굳이 정치혐오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그와 같은 이들은 정치혐오의 자양분으로 사용될 뿐이지 정치혐오를 통해 깎아내리려는 목표물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억지스런) 논리는 본인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다.
당신은 정치하기 전에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었고,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가졌을 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은 부패했으므로 당신도 부패했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정치혐오에 기댄 기존 정치인 일반에 대한 공격이 이런 수준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치인 일반이 우리 사회 일반보다 더 구태/부패했다는 설명에 대해 나는 그다지 공감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이 개개의 정치인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 만약 정치인 일반의 구태/부패가 개별 정치인에 대한 적합한 공격의 근거라고 전제한다면, 그 공격은 대부분의 경우 이를 주장하는 ‘정치신인’에게도 동일한 논리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유력정치인 혹은 정치를 지망하는 분들은 ‘기득권’, ‘청산대상’이라는 표현으로 다른 정치인을 손쉽게 깎아내리려 들지 말아달라. 당신들은 일반시민이 아니다. 그러니 정치혐오가 아닌 정책으로 승부해달라.
원문 : 남재욱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