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든, 사상이든, 철학이든, 신념이든, 유행이든 한국 사람은 특정한 한 가지만 옳다고 여기며 그것만 숭앙하고 다른 것은 강하게 배척하는 근본주의적·원리주의적(Fundamentalism) 성향이 강한 듯하다. 왜 그럴까?
이 주장에 대해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선 그건 한국 사람만의 성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간은 항상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 그 시대, 그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종교, 사상, 철학, 신념 등이 항상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 반론은 타당하며 한국인’만’ 유독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비교’라는 것이 있다. 현시대에서 지구 상 여러 나라 및 여러 사회와 비교해 보면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하고 모델로 삼을 만한 성숙한 여러 사회에 비해 아직은 다양성의 추구와 열린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는 사회 여러 영역에서 특정한 하나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그 외 다른 것은 강력하게 배척하는 경험을 수시로 당하며 살아간다. 서로 주고받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수가 이런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낀다.
사실 근본주의는 아주 쉬운 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이 생각해야 할 여러 가지를 진정성을 가지고 고려하는 것과, 반대로 이미 자신이 믿고 있는 혹은 자신이 끌리는 한 가지만을 절대적으로 붙잡고 그것만 옳다고 고수하는 것에서 당연히 후자가 더 쉽고 간편하다. 섣부르게 한 가지만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마침내 그것을 지키고, 주장하고, 믿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기실 그것은 ‘정신적 게으름’에 대한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더 찾고, 더 살피고, 더 보고, 더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혹은 할 줄 몰라서 그냥 시작에서 혹은 어느 지점에서 사유를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이와 연관된 주제의 글을 이미 여러 편 올렸다. 아래가 그 리스트다.
위 리스트의 글들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들 주제와 연관해서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이 주된 목적이다. 즉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어차피 우리 모두가 그 구성원이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라기보다는 어차피 모두가 어우러져 만드는 것이 이 사회 전체이므로 이러한 성향에 모두가 공동 책임이 있고 또 공통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나 스스로를 보고, 나부터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근본주의의 정의
우선 ‘근본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란 용어는 본래 개신교 원리주의(Protestant Fundamentalism)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10년에서 1915년 사이 미국에서 부유한 사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300만 부나 출판된 『The Fundamentals』란 책 제목에서 유래하였다. 종교의 교리에 충실하려는 운동이며 경전의 내용에 대한 문자 그대로 절대적 준수를 지향한다고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당시 미국 성공회, 미국 장로교, 미국 감리교 내에서 주류를 차지하던 자유주의 신학 이론과 성서 비평학에 대항한 보수반동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런데 현재는 이러한 의미가 확장되어 기독교만이 아니라 웬만한 종교들 내에서 교리나 전통에 충실하면서 뭔가 극단적인 양태를 보이는 경우를 공통적으로 근본주의, 원리주의, 정통주의라 칭하기도 한단다. 예를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 힌두교 민족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불교 정통주의 등이다. 즉 특정 종교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경우에 공통으로 사용되도록 확대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좀 더 확장해서 지칭할 것이다. 즉 종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뭔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만든 것, 물려받은 것,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특정 원리나 이론 등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여기는, 고집하는, 집착하는’ 모든 경우를 근본주의적 경향이라 칭할 것이다.
꼭 ‘OECD 국가’ 운운하지 않더라도 현시대의 성숙한 국가와 사회들은 더 많은 다양성과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 개인과 집단 모두가 추구하고 있는 지점들이기도 하다. 그러한 변화로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부조리한 억압과 차별, 충돌 등을 없애가며 사회 구성원들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협력하는 것이 전체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실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부러워하는 서구의 여러 사회가 있다. 핀란드, 스위스, 스웨덴, 독일, 뉴질랜드 등.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지만 그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의 성숙화가 가장 부러운 경우다. 그런데 이들 나라조차도 수십 년 전에는 다른 나라 못지않은 경직성과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고 지혜를 모아 기존의 잘못된 시스템을 없애거나 고쳐 현재와 같이 만든 것이다. 즉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애써서 함께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들처럼 지혜를 모으고, 협력하고, 열린 사회를 지향하고 만들어 갈 수 있다. 물론 그냥 되는 것은 아니며 개인과 집단 모두의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교육,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다 방면에 걸쳐서 공동의 합의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와중에 충돌과 싸움도 계속 있을 것이다. 이 글과 같은 것들도 그러한 공동 노력의 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원칙주의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에서 ‘원칙’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을 되도록 잘 유지하려 하고 지키려 하는 원칙주의도 필요하다. 다양성과 유연성 등도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지만 원칙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제 원칙을 고수하고 언제 다양성과 유연성을 적용할 것인가는 순전히 그 적절성, 효용성, 유용성, 실용성 등에 달려 있다. 결국 원칙주의냐 다양성이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어느 것을 선택하든 얼마나 적절하고 실용적인가가 핵심인 것이다.
사실 원칙주의와 원칙주의자들이 세상에 기여하는 바도 결코 적지 않다. 때론 원칙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때 원칙을 지키는 것은 지혜와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원칙론과 다양성을 동시에 고려하며 필요할 때 적절히 골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바람직한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유연한 원칙주의가 필요하다.
문제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주의가 아니란 것이다. 얼핏 사람들이 원칙주의와 비슷한 듯 느끼고 인식하지만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칙주의가 실제 사람들의 행복, 전체의 이익, 효용성과 실용성 등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반해 근본주의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그 ‘근본, 원리’ 자체가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확보하고 주장하고 싶은 ‘내가 옳다’는 심리가 목적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주객의 전도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왔다. 도구만이 아니라 언어적 개념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인간의 모든 개념도 사실상 도구이다. 원칙과 원리 등도 사실은 도구이다. 무엇을 위한? 바로 인간 자신의 행복과 실용을 위한.
만약 인간이 어떤 물건을 도구로 만들었는데 어느 때 이후부터 그 물건을 절대적인 무엇으로 모시기 시작한다고 해 보자. 얼마나 웃긴 일인가. 언어적 개념도 마찬가지다. 어떤 개념이든 다만 도구일 뿐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언어적 개념이 다 환상이고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란 것이다. 모두 나름의 효용성이 있다. ‘만들어진 것이지만 효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인간이 만든 여러 물리적 도구들이 그 자체로 효용성 있고 의의가 있듯이 언어적 개념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주객이 바뀌어 인간이 스스로 만든 언어적 개념들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에 지배되는 경우이다. 강요에 의해서든 자발적이든 말이다.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자들이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그 어떤 원리나 근본들은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들이다. 관찰과 심여를 기울여, 필요에 의해 혹은 맥락에 의해. 그리고 나름 유용하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이 만든 그 원리를 오히려 유용한 이상으로, 필요 이상으로 절대시하고 전부시한다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상황이 거꾸로 되는 것이다. 왜? 실제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의존과 책임 회피
앞서 근본주의는 정신적 게으름의 문제라고 했지만 사실은 ‘의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의존의 존재이다. 자신의 존재성, 존재 가치, 존재 의의 등을 여러 대상들에 의존하려고 한다. 실제는 그런 의존은 다만 도구일 뿐 그 대상과 그 의존이 없다고 해서 존재성의 근본이 영향받는 것은 아님에도 ‘나의 존재성은 내가 의존하는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에 빠져 있다.
근본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생각’에 자신의 존재성을 의존하는 행위이다. 또한 그 근본주의를 창안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종교이든, 사상이든, 윤리이든, 세계관이나 인간관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주의할 것은, 그런한 ‘관’ 즉 일정한 관점을 가지지 말자거나 그러한 관들이 모두 문제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도구이므로 필요한 관점은 얼마든지, 언제든 만들어 사용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화하고, 전부시하고 그리고 불필요하게 적용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고집하고 고수하고 의존하는 경우다. 근본주의가 바로 그렇다. 자신이 만든 것에 자신이 먹혀 버리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또한 ‘내가 무조건 옳다. 나만이 옳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그렇기 위해선 타인은 틀려야 한다. 옳고 그름, 맞다 틀리다를 따지는 행위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삶은 그러한 무수한 ‘측정’의 연속이다. 문제는 ‘무조건’이다. 변화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의 양태가, 드라이한 측정치가 ‘무조건’화 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어느 편 또는 누군가가 무조건, 항상, 영원히 옳다는 것은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다. 자연에도 그런 건 없다. 항상 순환하고 변환하면서 연속되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다. 그런데 그걸 고정화시키고 화석화시키겠다는 것이 근본주의이다. 어리석은 판타지이다. 어린 시절 경험하다 넘어섰어야 할 일종의 신비주의적, 신화적, 마법적 관점이다.
근보주의는 또한 책임 회피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존재하는 특정 생각, 원칙 등을 그대로 절대화시켜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가 된다. 내가 만든 게 아니니까. 나는 그냥 기존에 옳다고 하던 것을 받아들인 것이니까. 혹시 나중에 틀려도 그건 그 기존의 주장, 생각, 원칙의 잘못이고 또 그걸 만든 사람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눈치채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근본주의적 사유에 빠져든다.
회오리 모델
근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다양성’을 많이 이야기한다. 타당하다. 그래서 필요한 곳에, 필요할 때까지는 다양성의 발견, 키움, 활용, 확대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건강한 사회일수록 다양성이 활발하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다양성 모델이 충분히 유용하며, 현재로서는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도 한계가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다양성이란 것도 하나의 ‘원리’이다. 근본주의는 원리주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만약 다양성을 절대화한다면 그 역시 또 하나의 근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아니, 근본주의도 안 된다, 다양성도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하자는 말인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게 아니라 근본주의든 다양성이든 실제 그 구조와 정체를 정확히 알아채자는 말이다.
여기에 가장 적절한 메타포가 바로 ‘회오리 모델‘이다. 소용돌이라 할 수도 있다. 마당에서 일어나는 작은 먼지 회오리에서부터 태풍이나 토네이도 같은 거대 회오리도 있다. 집의 수챗구멍에서 생겨나는 소용돌이도 있다. 우리의 은하도 거대한 팔을 여러 개 가진 회오리 형상이다. 수많은 은하가 그렇다.
회오리는 두 개의 서로 맞부딪히는 힘이 팽팽히 대응하다가 순간 한쪽으로 쏠리면서 형성된다. 즉 ‘하나’가 만들어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두 개 이상의 힘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회오리 한가운데의 ‘빈 공간’이다. 보통 태풍에서는 태풍의 눈이 된다. 작은 회오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 간의 기하학적 지점으로 회오리의 중심 즉 눈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지점의 특징은 ‘빔’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주위를 도는 회오리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근본주의는, 어쩌면 스스로 그 회오리의 빈 중심이 되고자 하는 허망한 꿈이다. 망상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두 개의 힘이든 그 이상의 힘이든, 서로 부딪히며 맞물리다가 이제 서서히 혹은 급격히 그 힘의 균형이 흔들리면서 형성되는 것이 회오리이다. 여기서는 사람의 생각, 주장, 의도, 뜻 등이 그 힘이라고 보자. 하나의 생각이나 주장만으론 회오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뭔가 흐름이 생겨나고 에너지가 생겨나고 동력이 생겨나려면 여러 힘이 서로 허용되면서, 상호 작용을 일으켜 회오리가 일어나야 한다.
근본주의든 다양성이든 혹은 그 어떤 생각의 사조이든 모두 이 ‘힘’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힘도 그 하나만으로 절대적이지 못하며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근본주의는, 말하자면 멈춰버린 회오리이다. 다른 아무 힘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죽은 것이다. 다양성은, 회오리를 형성하고 그 힘을 강화시켜나가는 데는 무척 유용하다. 그러므로 잘 사용하면 할수록 좋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양성 그 자체를 절대화하면 또한 그 회오리는 멈추게 된다. 인간이 만들고 추구하는 모든 생각, 주장이 그렇다. 근본주의도 다양성도 다 인간이 만들어 쓰는 도구이다. 설정이다. 그 필요에 의해 유용한 곳에는 얼마든지 써야 한다. 대신 잘 써야 한다. 과도하게 쓰거나 불필요하게 쓰면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한다.
다만 근본주의는 ‘건강한 원칙주의’로 가야 한다. 근본주의 자체는 왜곡된 그 무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원칙, 진리, 원리 등이 그 본래의 목적성을 잃고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면(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지배당하는 것인데), 그러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고통과 혼란과 긴장이 일어난다. 효율성도 떨어진다.
얼핏 근본주의자 당사자들은 괜찮은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무의식과 심층 의식에서 혹은 내면에서는 혼란스러운 무엇이 계속 생성되고 쌓여간다. 어느 정도 임계치가 넘으면 그것은 그 개인의 혼란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집단적 혼란, 집단 간 혼란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현재 인간이 스스로 빠져들고 만들고 경험하는 많은 고통과 혼란이 이에 기인한 것이다.
근본주의든 다양성이든 그 외 어떤 생각과 주장과 사조든 인간이 주인이다. 그을 위해 혹은 그것들을 위하는 인간들을 위해 다른 같은 인간들이 억압당하거나, 강제와 강요를 당하거나 혹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단지 근본주의적 생각만이 그 원인이 아니라 인간종의 기본적인 동물적, 인간적 탐욕, 욕심, 집착, 분노, 무지가 그 원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느 영역에서든 고집하는 근본주의적 경향은 그 모든 것을 악화시킨다.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 각 개인이 모든 생각과 주장과 사조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들을 위해, 혹은 그것들을 위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과 다른 인간들을 도구나 제물이나 희생물로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원문: 필로 이경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