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교수가 한국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다룬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불평등’이 확산된 시점은 1995년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IMF 사태가 있었던 ‘1997년’이 아니라 ‘1995년’을 기점으로 불평등이 확산됐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IMF사태는 1997년 11월에 있었다.)
1995년이 도대체 무슨 해이길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왜 하필 다른 연도도 아니고 1995년에 불평등이 확산되었을까? 1995년 이전까지는 불평등이 줄어든다. 그런데, 1995년을 변곡점으로 불평등이 확산되고, 1997년을 거치면서 불평등 확산의 기울기가 더 가팔라진다.
장하성 교수는 본인이 제시한 그래프에서도 1995년부터 불평등이 확산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자세히 해명하지 못하고 ‘1997년 IMF 사태로 인해’ 불평등이 확산되었다고 ‘퉁치고’ 넘어간다.
1995년을 기점으로, 불평등의 확산을 다룬 거의 모든 자료가 만장일치로 똑같다. 장하성 교수가 정리한 지니계수 자료, 김낙년 교수의 자료, 한국노동연구원의 홍민기 박사가 정리한 자료가 모두 한결같다.
그동안 이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주는 책이나 논문을 접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1995년을 변곡점으로’ 불평등이 커졌을까? 이 궁금증은 ‘불평등 확산의 원인’과도 연결될 수 있는 질문이기에 매우 중요하지만, 아쉽게도 이 질문에 해명하는 경제학자를 그동안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봤던 정이환 교수의 『한국 고용체제론』(2013년, 후마니타스)에서 드디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 정치학의 대가(大家)가 최장집이고, 재벌 문제의 대가가 장하성-김상조-전성인-박상인 교수라면, 한국 노동문제의 대가 중 한명은 노동사회학자인 정이환 한국과학기술대 교수를 꼽을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노동문제의 구조를 파악하려면 정이환 교수 책은 꼭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이환 교수는 일찍부터 ‘비정규직’ 프레임보다 ‘기업규모’ 프레임이 불안정노동,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더욱 정확히 설명한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논자였다. (이 책 7장에서 실증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정이환 교수의 『한국 고용체제론』이라는 책은 ‘고용체제’라는 관점에서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를 분석한다. 이 책의 핵심은 후반부인 제7장~제10장에 몰려있다.
- 제7장. 노동시장 분절요인으로서의 기업규모와 고용형태
- 제8장. 1987년 이전 고용체제의 재조명
- 제9장. 고용체제로서의 1987년 노동체제
- 제10장. 1997년 경제위기와 고용체제의 변화
그리고 이 중에서도 백미는 7장, 8장, 9장이다. 1995년을 변곡점으로 불평등이 확산되는 것을 중심화두로, 정이환 교수의 제7장부터 제10장 사이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고용체제론』 요약
1.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정규직-비정규직’보다 ‘기업규모간’ 이중구조가 더 심하다. 물론, 정규직-비정규직 격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규모에 의한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더 규정적이다.
2. 그런데 1987년 이전 기업규모별 임금격차는 별로 심하지 않았다.
3.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과 이후를 비교할 경우, 내부노동시장이 더욱 강력해지고, 기업규모간 임금격차도 커진다.
4. 흥미로운 것은, 임금 격차는 노동자대투쟁이 있기 이전인 1987년 이전에도 ‘일부에서’ 확대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자본장비율이 높은=중화학공업’인 경우가 그랬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정이환 교수는 연도는 ▴1982년 ▴1986년 ▴1989년을 구분하고, 같은 제조업이어도 ▴저장비율 업종 ▴중장비율 업종 ▴고장비율 업종으로 구분해서 회귀계수를 뽑는다.
그랬더니 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에도(=1982년과 1986년을 비교하면) 저장비율 업종보다 → 중장비율 업종일수록, 중장비율 업종보다 → 고장비율 업종일수록 ‘임금격차’가 커지는 것으로 나온다.
5. 소결하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초적 기원’은 두 가지를 동력으로 했는데, 한 축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고, 다른 한 축은 중화학공업(자본장비율)이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기업규모간 격차가 커지기 시작했고, 중화학공업일수록 임금격차가 커졌다. (게다가 재벌=대기업=중화학공업은 서로 합체로보트인 경우가 많다.)
6. 그런데 전체 통계를 보면 1987년~1995년까지 불평등은 완화되는 것으로 잡힌다. 그 이유는 87년~89년의 3저 호황효과로 인해 제조업-중하층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부족을 맞게 된다. 즉, 87년~90년대 초반 동안은 두 가지 상이한 흐름이 상존했던 것이다. 하나는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업규모간 격차’가 확대되는 흐름과 3저 경기호황 효과 및 노동력 수급부족으로 인해 중하층 노동시장에 있는 노동자들의 소득이 상승했다.
7. 그러나 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다시 불황을 맞게 된다. 정이환 교수가 책에서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고 있듯이, IMF 체제 이전에도 기업들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등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1995년을 기점으로 불평등이 다시 확대된다. (불황으로 인해 중하층 노동시장의 노동력 수급부족 문제도 다시 사라진다.)
8. 정이환 교수 책에는 안 나오지만, 1997년 IMF 이전이었던 97년, 96년, 95년 ‘경상수지가 적자’였던 기억을 환기해보면 90년대 중반이 불황이었던 것은 금방 기억해낼 수 있다. 한보철강 부도, 기아자동차 부도 문제가 부각되는 시점은 95년~97년이었다.
9. 1995년을 변곡점으로 불평등이 확대되는 추세에서 결정적으로 1997년 IMF 사태가 터진다. 1997년 IMF 충격을 받게 되자, 정부와 자본은 정리해고, 구조조정, 아웃소싱, 원가절감, ‘수익성 극대화를 추구하게 된다.
주로 대기업에 몰려있는 ‘조직된 노조’는 이에 대해 대항을 하게 되지만, 하청자본-하청노동은 ‘대항력’이 취약했기에 이들에게 ‘비용이 전가되어’ 노동시장의 분절-이중화는 더 심화된다.
10. 즉,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형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기점으로 기업규모별 임금격차와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확산됐는데, 3저 호황 시기와 맞물려서 전체 통계로는 불평등이 축소된다. 그러나 다시 3저 호황이 끝나고 1990년대 초반 경기불황이 오자 (일본의 종신고용과 달리)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하청업체에게 비용을 전가시키는 방식을 일부에서 사용하다가, 1997년 IMF충격 이후 본격적으로 (부채 비율 축소, BIS 비율 등과 맞물려) 수익성 극대화 전략으로 취하게 된다.
이에 대해 조직노동의 경우 나름 대항력을 발휘하며 방어했지만, 하청-미조직-주변부 노동은 비용을 ‘덤탱이’ 쓰게 된다.
11. (이 부분은 최병천 생각인데) 이런 논리에 의하면, 최근 불평등이 완만하게 완화되는 추세도 이해가 가능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이다.
- <대기업+중화학공업> 확대가 한계치에 다다랐다. 임금격차 확대의 두 가지 요인은 기업규모별 요인과 중화학공업(자본장비율) 요인이었다. 이게 둘 다 한계에 도달했다.
- <대기업+중화학공업>은 동시에 <내부노동시장=수출산업=제조업>이었다. 그런데, 제조업 수출 둔화, 제조업 성장률의 둔화에서 알 수 있듯이, <내부 노동시장의 불황 및 경기위축>으로 인해, 불평등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즉, ‘하층의 소득이 상승해서’ 소득불평등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득 상층 10%=대기업 노동=제조업=수출산업’ 노동의 소득이 줄어들고 있기에 불평등이 완화되고 있는 것이다.
12. (이 부분도 최병천 생각인데) 물론, 불평등이 완화되는 요인 중에는 기초연금 도입과 노인 일자리 사업 확대로 인해 노인빈곤율이 줄어들고 있는 것 등도 부분적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소득상위 10%는 40대~50대 재벌대기업=양대노총일 가능성이 높고, 소득하위 10%는 60세 이상의 ‘1인 가구 + 일자리 없는 + 빈곤노인’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원문 :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