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을 공부할 때, 아마도 제일 먼저 공부하게 되는 것이 바로 ‘무드보드’일 겁니다. 뭐 무드 보드라 하기도 하고 이미지 맵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리는 작업이죠. 자기 컬렉션을 프리젠테이션 할 때 가장 먼저 손대게 되는 작업이지요. 단지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무드 보드라고 불렀으므로 앞으로 무드 보드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무드 보드라는 놈은 무엇이며 이걸 왜 하고 있느냐, 이것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무드보드 : 하나의 아트워크, 혹은 모든 것을 함축하는 틀
예를 들면, 비틀즈의 음악을 듣는다고 치지요. 비틀즈의 앨범을 구매하건 다운로드 받건, 가장 먼저 눈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티스트들의 ‘앨범 커버’일 거에요.
이 앨범 커버를 요약해 보자면, 앨범의 성격을 규정해 주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이 앨범이 어떤 분위기일 것이라는 것을 일정 부분 암시 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즉 요약하자면 ‘앨범 커버=앨범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앨범 커버에 단순히 잘 나온 아티스트의 사진을 쓰는 경우도 많지만 앨범 커버가 아티스틱 할수록 그 안에 어떤, 음악으로 풀어낼 컨셉이 요약되어있는 스토리텔링이 담겨있을수록 이 앨범은 단순한 음악 이외의 의미를 가지게 되겠지요.
영화로 이야기하면 좀 더 쉬워집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 전에 일반적으로 영화 포스터를 보게 되지요. 그리고 이 포스터는 이 영화가 어떤 느낌일지, 어떤 영화일지 아주 상징적으로 요약해서 보여주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영화 자체보다도 영화 포스터가 더 유명하기도 하고요. 일종의 시적인 요소라고 할까요?
두어 시간 동안 감독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영화 포스터이며, 따라서 영화 포스터는 영화의 흥행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하지요.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패션에서 무드 보드는 똑같은 역할을 합니다. 전체적인 컬렉션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트웍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어떤 컬렉션을 구상하기 전에 그런 모든 것들을 함축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만들어 보는 것이 무드보드의 가장 중요한 의미일겁니다.
일반적으로 무드보드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이야기하자면, 아무런 제약도 형식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만들면 됩니다. 그래서 콜라주 같은 기법을 많이 사용하곤 하지요. 그림으로 그려도 되고 3D로 제작해도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시간을 절약하고 좋은 효과를 내기 위해 이미 어떤 용도로 사용된 이미지들을 재조합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는 콜라주는 무드보드 제작에 적격인 기법입니다.
무드 보드를 만들 때 필요한 TIP
자, 그러면 무드 보드를 만들 때,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팁을 이야기해 보지요.
앞서 적은 대로 무드보드는 이 컬렉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하나의 아트웍이기도 하죠.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주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첨부한 사진들에는 제 기준으로 볼 때, 잘 만들어진 무드보드와 잘 못 만들어진 무드보드가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무드보드까지는 전형적인 잘 만들어진 무드보드 들이며, 그중에는 실제로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컬렉션 무드보드인 것도 섞여 있습니다. 이것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은 이렇습니다.
-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함.
- 레이아웃이 보기 좋고 컬렉션의 전체적인 성격이 어느 정도 이해되도록 구성되어 있음.
- 컬렉션에 사용될 컬러나 소재들의 특징이 눈에 보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진은 팝아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요. 가장 대표적인 팝아티스트인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백그라운드에 넣고, 팝아트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반복’ 요소를 모델의 배치를 통해 구현하고 있네요. 아주 훌륭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단출하긴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할 이야기는 다 한 느낌입니다.
이 두 개의 무드 보드 역시 오브제들의 레이아웃이나 색감, 분위기가 선명하게 와 닿습니다.
이 경우는 제가 주로 사용하는 방식인데, 그 안에 일종의 스토리텔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모두 다른 이미지임에도 비슷한 계열의 컬러들과 비슷한 느낌의 사진들을 조합함으로 인해 일종의 조화가 느껴지고 내러티브하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나요.
다섯 번째 사진부터 마지막 사진까지의 무드보드는, 안타깝지만 아주 전형인 ‘한국식’ 무드보드이자 무드보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무드보드라고 하겠습니다. 이 안에는 아무런 감정도 스토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드보드라고 하기보다는 ‘스크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겠지요. 그저 비슷한 느낌의 사진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것 이외의 어떤 감정작용을 전혀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자, 여기서 간단한 팁을 드리려고 합니다. 멋진 무드보드를 만들기 위한 팁입니다.
- 레터링을 최소화할 것
- 공간을 적절히 사용할 것
- 여백을 적절히 사용할 것
- 런웨이 사진을 최소화할 것
- 무드보드 안에 스토리 텔링을 집어넣을 것
무드 보드는 이미지 작업입니다. 즉,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작업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무드보드에 텍스트가 개입되는 순간, 이런 ‘이미지’로서의 의미가 망가져 버립니다.
예를 들면 가을을 주제로 무드 보드를 만든다면, 가을 냄새가 나는 이미지들을 사용함으로써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굳이 거기다가 ‘가을’ 혹은 ‘Fall’이라고 적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텍스트로 명시된 단어는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빼앗아 버립니다. 마치 “여기 이미지가 무엇이든 간에 넌 가을을 떠올려야 해!”라고 강요하듯이 말이지요.
물론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것들, 즉 텍스트이지만 기호학적으로 결국은 도형으로 인식되는 텍스트들은 예외입니다. 첫번째부터 네 번째 무드보드에는 글자 수가 아주 적지요. 굳이 글로 풀지 않아도 이미지로 모든 것이 받아들여 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무드 보드는 그런 면에서 완전히 실패작으로 보입니다. 마치 패션 잡지의 238 페이지쯤에 있을 법 한 쇼핑가이드 같네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레이아웃 역시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두 번째 사진과 세 번째 사진, 네 번째 사진 속의 오브제들이 어떤 위치에 어떤 크기로 어떻게 놓여있고 그것들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사진들의 사이즈와 위치 관계 등이 중요하겠네요. 이 연습은 결국 후에 디자인을 할 때에도 도움이 많이 되곤 합니다.
두 번째 사진과 세 번째 사진의 가장 큰 차이라면 여백을 사용하는 방식이겠지요. 콜라주 작업을 흰 종이 위에 하다 보면 흰 공간이 점점 사라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이미지들을 배치해 나가다 보면, 잘라낸 사진의 라인이나 종이의 흰 부분이 서로 겹치면서 꽤 보기 싫은 자국들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두 번째 작업의 경우엔 그 경계선을 검정색 라인을 이용해서 슬기롭게 해결했고, 세 번째 사진은 흰 공간을 일종의 도형으로 보이도록 사용함으로써 보기 싫게 만들어지는 것을 피해갔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사진의 흰 여백이나 사진을 잘라낸 라인이 얼마나 눈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 경계선이 거슬리는가를 비교해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런웨이 사진을 붙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쉽게 요약하자면 이럴 것 같습니다. 무드보드는 일종의 재생산 과정입니다. 즉 이미 어떤 목적으로 쓰였던 사진들을 조합해 완전히 다른 목적의 이미지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죠. 그런데, 런웨이 사진 속의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이런 과정을 이미 거쳐 생산된 어떤 디자이너의 의도가 드러나 있는 사진입니다. 즉, 재생산이 불가능한 상태의 사진이라는 겁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드 보드는 맨 처음에 적은 대로, 컬렉션을 디자인하기 전에 전체적인 컬렉션의 주제와 소재, 컬러 등 모든 요소가 집약된 하나의 아트웍입니다. 그 안에 단순한 컬렉션의 분위기 외에도 이야기 하고 싶은 어떤 스토리들이 담긴다면 더 컬렉션을 잘 묘사할 수 있겠지요.
무드보드는 단순히 숙제로 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좀 더 큰 의미에서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할 때, 무드 보드를 만드는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니 방학 동안 많이 만들어 보시길.
원문 : Haklim Lee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