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광장
도시가 발달하기 이전 역전 광장은 군중 집결장소로 널리 애용됐다. 몇몇 사례를 보자.
제2공화국 시절인 1961년 3월초 당시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에 반대하는 소위 ‘2대 악법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그 중심지는 당시 혁신계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대구였다. 3월 25일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규탄대회에는 대학생, 시민 등 수 만 명이 모였다. 이날 시위는 며칠 뒤 서울에서 열린 ‘4.2 투쟁’으로 이어졌고, 민주당 정권은 마침내 2대 악법의 국회통과를 포기하였다.
‘1노 3김’이 맞붙은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대전은 어느 지역보다도 뜨거운 격전지였다. 그해 10월 24일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는 대전역 광장에서 유세전을 펼쳤는데, 무려 20만 명이 운집했다. 이날 대전 인파는 역 광장 5천500평을 완전히 메우고 역에서 충남도청 앞까지 1km의 6차선 도로를 꽉 채웠다. 이날 인파는 대전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걸로 기록돼 있다. 비단 정치 행사뿐만이 아니었다.
1999년 여름, 부산역 광장에서는 정부의 삼성자동차 청산 방침에 반발하는 대규모 규탄집회에 수 만 명이 운집하였다. 이날 부산역 광장은 민의의 토론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역 광장은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민자 역사가 들어서면서 광장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역을 비롯해 부산역, 대전역, 대구역 등 전국의 주요 역 주변은 모두 상업화 물결로 넘쳐나고 있다. 서울역과 대전역은 택시 승차장으로 인해, 부산역은 둥근 조형물과 소공원으로 인해 광장이 제 모습을 잃고 말았다. 모일 곳은 잃은 시민들은 소광장이나 골목 등지로 몰렸다.
광장이 없던 시절에는 공원이나 천변(川邊), 공터 등을 이용했다. 1956년 5월 대통령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가 사자후를 토한 한강 백사장 유세에는 30만 인파가 운집했는데 ‘백사장이 흑사장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밖에도 서울에서는 초기에는 장충단공원과 남산 야외음악당이, 80년대 이후에는 여의도광장, 보라매공원, 한강 고수부지 등이 대규모 군중집회 장소로 애용되었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7주에 걸쳐 주말마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대구에서는 구 대구백화점 앞 골목, 부산에서는 서면 중앙로 일대, 대전에서는 둔산동 타임월드 앞에서 등에서 열리고 있다. 전주는 오거리 광장, 울산은 삼산동 롯데백화점 앞, 청주는 충북도청 앞, 성남은 모란시장 등에서 촛불을 들었다.
작금의 촛불집회의 메카는 서울 광화문광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역 광장이 내친 시민들을 시민광장이 품어 안았다.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지난 10월 29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첫 촛불집회를 가졌다. 이후 광화문광장으로 장소를 옮긴 2차 촛불집회에는 20만 명이 모였으며, 3차 100만 명, 4차 100만 명, 5차 190만 명(지방 40만 명), 6차 232만 명(지방 62만 명) 등으로 급증하였다. 시민들은 한결같이 평화의 촛불을 들었고, 전 세계인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난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압도적인 찬성표로 가결되었다. 시민 수천 명은 전날 밤 국회 앞 도로변에서 비를 맞으며 밤샘 집회를 가졌다. 국회에서의 탄핵안 가결은 국회의원들의 공로만은 아니다. 지난 6주간 전국의 광장과 노변에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든 시민들의 승리라고 봐야 한다.
탄핵안 통과 이튿날인 10일 전국에서 또다시 촛불이 켜졌다. 탄핵안 통과를 자축하는 승리와 기쁨의 촛불이었다. 그러나 촛불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촛불이 켜지면서 광장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전국의 크고 작은 광장은 이제 정의와 민주주의 수호의 본거지가 되었다.
원문 : 보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