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촛불집회는 시대에 맞춰 진화한 시위 방법들을 보여주었다.문화공연, 함께 노래 부르기, 구호 외치기, 함성 지르기, 촛불 파도타기, 시민 학생 자유발언, 거리행진 등은 촛불집회의 공식이 되었다. 거리행진 중에도 트럭을 무대로 삼아 자유발언이 이어진다.
소속된 단체가 없는 시민들은 스스로 기발한 단체명을 짓고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민주묘총’, ‘고산병연구소’, ‘응원봉연대’ 등이 그것이다.
시민단체가 시국선언문을 기초하여 구글독스에 올리고 SNS에 공유하면 자발적으로 들어가 서명을 하고 후원금을 보낸다. 그 돈으로 시국선언문과 명단을 광고로 제작하여 경남도민일보와 같은 신문에 싣기도 한다.
탄핵 국면이 되자 박근핵닷컴에 들어가 자기 지역구 의원에게 박근혜를 탄핵해달라고 청원 메일을 보내는 그림이 연출되었다. 박근핵닷컴 청원 메일은 12월 8일까지 총 89만 8000여 명의 청원 메일이 배달되며 어마어마한 열기를 보여줬다.
또한 ’18원 후원하기’도 화제가 되었다. 18원 후원하기가 뭐냐고? 한 누리꾼의 설명을 보자.
쉽게 말해 탄핵에 동참하지 않는 나쁜 의원을 엿먹이는 방법이 18원 후원하기다.
지난 7일 창원시 명곡동 새누리당 경남도당 사무실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선 국회의원들을 압박하는 새로운 시위방식도 등장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전화번호를 집회참석자들에게 보여주고, 일제히 탄핵을 요구하는 문자메시지를 발송하는 이벤트다. 사회자는 시민들이 문자를 보낼 시간을 주고 난 후, 어떤 문자를 보냈는지 시민이 일어서서 공개적으로 읽어준다. 국회의원 입장에선 일시적으로 문자폭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과거 1960년 3.15의거와 4.19혁명 때는 경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고, 반공청년단 등 정치깡패들이 자전거 체인 등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에 시민들도 거기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집회와 시위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곤봉과 최루탄으로 폭력 진압했기 때문에 시민과 학생은 돌멩이를 들 수밖에 없었고, 파출소를 불태우기도 했던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도 마찬가지였다.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총칼과 탱크, 장갑차로 시민을 진압했기 때문에 시민 역시 살아남기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때도 경찰은 원천봉쇄와 최루탄, 곤봉으로 집회와 시위를 강제진압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화염병과 돌멩이를 들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때는 차벽과 컨테이너 벽이 등장했다. 이를 시민들은 ‘명박산성’이라 불렀다. 그 명박산성을 마주 보고 시민과 경찰은 대치하고 싸웠다. 물대포도 그때 등장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는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어서 시민에게 쏘아댔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때도 차벽과 물대포가 남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남기 농민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촛불집회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청와대 100m 앞까지 시위가 가능하게 됐고, 경찰의 차벽도 최소화했다. 폭력도 사라졌다.
지난 3일 창원광장에 모인 1만여 명의 시민은 4km를 걸어 새누리당 경남도당 앞까지 행진했다. 거기엔 100명이 채 되지 않는 경찰이 새누리당사를 지키고 있었다. 시민이 밀고 들어가면 그까짓 뚫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찰과 합의하에 새누리당 출입구에 ‘박근혜-최순실 공범이당 경남소굴’이라는 종이로 만든 현판을 붙이고 환호성을 질렀을 뿐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새로운 혁명이 될 올해 촛불집회에서 다시금 확인된 것은 이렇다. 경찰이 헌법상 권리인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가로막지만 않으면 폭력시위는 생기지 않는다. 여태까지의 많은 폭력은 정권과 경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원문 : 지역에서 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