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의 탄핵 반대의원 전화번호 공개도, DJ DOC의 <미스 박> 논란도 컨텍스트를 놓치고 진영논리에 따라 쓸려 다니기만 한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는 도루묵이다.
표현의 자유의 제 1원리는 표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컨텍스트가 문제라는 것이다. 표현 자체를 처벌하려 하면 안 되고, 맥락과 정황 즉 컨텍스트 상 그 표현이 외부적 해악을 일으킬 ‘명백하고 임박한 위험’이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혐오표현 규제가 표현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이유는 소수에 대한 차별, 폭력을 선동할 경우 실제로 그러한 차별, 폭력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혐오단어가 있고 아닌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기표도 어떤 맥락과 정황에서 쓰여졌는가에 따라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다. 나치 문양이 버젓이 보여지는 영화 <발키리> 포스터가 독일에서도 회자될 수 있는 이유는 그 맥락과 정황이 소수에 대한 차별 폭력을 선동할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DJ DOC의 <미스 박>은 혐오표현인가?
DJ DOC의 <미스 박>도 마찬가지다. <미스 박> 자체가 혐오단어인 것이 아니다. 사적인 상황에서 <미스 박>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과거의 성차별적인 상황을 조롱하며 정말 얼마나 신나게 흥겹게 놀 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진짜 친한 미국 여성들끼리는 술 마실 때 서로를 “다이크(dyke)”라며 즐거워한다. 동창회에서 남자들끼리 “이 새끼”, “저 새끼” 하면 친분을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흑인에게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단어 “니거(nigger)”도 흑인들끼리 신이 나서 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이]”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아야 할 “말씀”은 없다.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을 표출하는 표현들은 1차적으로 모두 이 세계에 시민권이 있다. 그중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표현들은 맥락과 정황상 타인에게 피해를 줄 위험이 명백한 것들뿐이다.
그러나 DJ DOC의 <미스 박>은 혐오표현임이 확실이다. DJ DOC는 박근혜를 조롱하고 비난하기 위해 가사를 쓴 것이고 마침 박근혜가 사회적 약자인 여성임을 이용해 <미스 박>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여성들을 차별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단어인 <미스 박>을 그런 목적으로 재활용한 것이다. 이것은 오바마 대통령을 공격하고 싶은 사람이 그의 인종을 이용해 nigger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2012년 대선 때 김용민이 “럼즈펠드와 콘돌리자 라이스를 강간하자”라고 한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김용민은 당시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죄수들이 간수들에 의해 성추행을 당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었지 라이스의 여성성을 보고 ‘강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다.
‘강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든 사전에서 퇴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촛불시위의 근원이 되었던 효순이 미선이 추모시위에서 나온 “Fucking USA”라는 구호도 반여성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징 학살이 아직도 Rape of Nanjing으로 번역되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처참함을 보여주는 단어들을 검열해야 한다면 앞으로 그런 처참함을 막으려는 우리의 의지는 어떤 언어로 무장될 수 있겠는가.
표창원의 전화번호 공개는 문제가 되는가?
사실 표창원은 이름만 공개했고 익명의 제3자가 전화번호를 공개했지만 여기서는 편의를 위해 표창원이 공개했다고 치자. 표창원의 전화번호 공개가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맥락과 정황에서 국회의원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개인정보’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어 개인정보는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개인정보가 아닌 것은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을 물신화하는 것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의 목적은 프라이버시 보호이다. 노회찬 의원은 이보다 더 심한 개인정보도 공개한 적 있다. 비록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국민으로부터는 지지받는다. 특정 검사들이 삼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떡값’을 받았다는 것은 맥락과 정황상 프라이버시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표창원이 탄핵에 찬성하기 때문에 그의 정보공개를 지지할 것이 아니라 탄핵 찬반에 관계없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지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레이블링에 저항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의 선악을 규정하고 그것이 출현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것이 레이블링이다. <미스 박>이 나오면 무조건 ‘혐오단어’라고 규정하는 것도 일종의 레이블링이다. ‘개인정보’가 나오면 무조건 ‘프라이버시침해’라고 규정하는 것도 레이블링이다.
여기 최순실 게이트가 뭐가 문제냐고 시를 썼다고 해서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노시인이 있다. 최순실 게이트는 왜 나쁜지 논증하려 하지 않고, 촛불시위에 문제제기하는 모든 사람을 ‘무조건’ 악으로 보는 것도 레이블링이다. 시인이 싯구에서 말하는 것처럼 최순실에게 단순히 자문을 얻으려 한 것이라면 잘못이 없다.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은 박대통령이 자문을 구한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최순실에게 유리하게 국정을 운영하였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최순실을 위해 인사 학사 예산 등 전방위적으로 불이익을 당했고 엄청난 혈세가 최순실을 위해 허비되었다. 이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이 노시인을 무작정 공격만 하는 것은(심지어 이 시인이 80대인 것을 보고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취지의 댓글도 있다. 촛불시위의 진정한 의미에 반하는 현상이다. 촛불시위는 지배자에 대한 저항이지 지배적 흐름에 대한 순응이 아니다)
지금 엄청난 ‘쏠림’ 현상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MBC도 지난 일요일 톱뉴스로 촛불시위를 올렸다. 검찰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벼르고 있다. 난 전혀 기쁘지 않다. 그들이 무얼 생각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그냥 ‘대세’가 무서워서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지금의 최순실 게이트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박근혜라는 괴물을 키운 토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 대세가 바뀌었다고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박근혜 공격 경쟁을 하는 것과 대통령이 무섭다고 대통령에 충성경쟁을 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진정한 촛불시위는 그런 맹목적인 순응에 대한 저항이다. 특정 레이블이 등장한다고 무작정 DJ DOC를 비난하거나 표창원 의원이 탄핵에 앞장선다고 무작정 보호하려 하거나 최순실게이트의 맹점을 말한 사람을 무작정 공격만 하려고 한다면 촛불시위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필자는 참여연대 공익법센터의 일원으로서 함께 지난 1달을 집회시위의 자유를 위해 골몰했고 소송을 맡아준 양홍석 변호사의 말대로 법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다 뚫었다. 나머지는 시민의 몫이다. 헌법소송들이 좀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시민의 길은 청와대 100m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진정한 발전의 길이 뚫리길 기대한다.
원문 : 박경신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