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친구 한 분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다. 보수 교단 목사이지만 촛불 집회에 나가는 게 옳다고 생각되어서 광화문에 나갔고, 거기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포스팅엔 정반대의 댓글이 달렸다고 한다.
하나는, 목회자는 정치에 관심을 끊어야 한다는 비난인데, 촛불집회 나가지 말고 그 시간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것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목사는 설교와 기도에 전념하라는 논리다. 두 번째는, 촛불 집회에 나간 그 용기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맞을까? 이 분이 털어놓은 질문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헤겔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비극은 옳음과 틀림 사이에 있지 않다. 옳음과 옮음 사이의 선택과 갈등이 우리를 비극으로 몰아간다.
사실 이전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찾아오신 이 분의 사정을 듣고 나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둘 다 옳다. 목사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고 함께 소리를 높이는 것도 역시 분명히 옳은 일이다. 문제는 이 둘 가운데서 선택을 해야 하는 갈등상황이다.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여기서 루터의 말을 다시 인용해보자.
용감하게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 담대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이 문장은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납치되어 있을 때 동료 멜란히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전에 이 문장 해설을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무슨 말을 써 놓았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찌 되었건 이 문장만 떼어 놓고 보면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명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문장이 빛을 본 것은 히틀러 암살단에 들어갔던 본회퍼 목사 때문일 것이다. 본회퍼 역시 이 갈등이 분명히 있었다.
목사는 살인 행위에 가담하면 안 된다.
당연하게 옳은 명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옳다.
나라와 세상을 파괴하는 독재자는 제거되어야 한다.
본회퍼의 갈등은 틀림과 옳음 사이에 있지 않았다. 헤겔 말대로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문제는 생긴다. 그러나 반드시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저버린 비겁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때 본회퍼에게 위로가 되었던 목회적 권면이 저 유명한 루터의 글이다. “용감히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 용감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루터의 저 명제 안엔 분명히 해야 할 몇 가지 행동 원칙이 담겨있다. 첫째, 지금 행동이 이웃을 위한 행동이어야 할 것. 둘째,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 셋째,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기쁘게 감내할 것. 옳음과 옳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음미할 만한 내용이다.
촛불집회냐 아니면 골방기도냐를 놓고 고민하는 분들은 한 번 이 원칙을 고민해 보시길 바란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용감히 행동하시라. 설령 나중에 자기가 선택한 행동의 책임이 본회퍼처럼 사형선고가 될지라도 기쁘게 감내하겠다는 용기로 움직이시길 바란다. 촛불을 드는 일이든, 골방서 기도하는 일이든, 또는 그 시간에 영성 일기를 쓰시든 앞서 말한 세 가지 원칙에 부합하는 일인지 고민해 보시길 바란다.
끝으로 이것 하나 더 말씀드린다. “더 담대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이 말은 종말론에 대한 권면이다. 어떤 행동을 하든지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마음가짐과 태도로 임하라는 것이다. 누구 눈치 보지 말고 그렇게 종말 앞에 살아가는 마음으로 옳음을 선택하고 실행에 옮기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신앙 아닐까?
어쨌든 난 광화문으로 간다.
원문 : 최주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