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에 혼자 살다 보니 요리 정보나 생활 정보를 얻기 위해 주로 30대에서 50대 미국 거주 한인 여성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매일 접속합니다. 요리, 생활, 쇼핑, 질문 등등의 카테고리를 죽 훑어보고 필요한 정보들은 메모한 후에, 자유게시판에 접속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도 쭉쭉 넘겨 봅니다.
댓글이 몇십 건을 훌쩍 넘어가는 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글에 마음을 나눴나 싶어 손가락을 움직여 눌러 봅니다. 종종 어떤 일을 이루어 냈다는 자랑이 등장하면 모니터 멀리 있는 저까지 뿌듯해지고 기뻐집니다.
다른 글을 눌러 봅니다. 평생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고 예순이 넘은 지금도 폭력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글. 남편이 자신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고 아이를 내던졌다는 호소. 남편이 폭언과 욕설을 퍼붓고 집을 나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물. 경제력이 없고 아이가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울림.
그리고 그런 글에 몇십 건씩 달린 아이/여성 보호소 주소 및 전화번호, 법적 조언, 현실적인 충고, 도움을 줄 테니 연락하라고 남겨둔 개인 연락처, 그리고 모니터 너머로 전해지는 뭉클한 위로. 이 글들을 마주하고, 저는 조용히 시간을 되돌려 봅니다.
2.
스물둘인가 스물셋쯤 되었을 때. 엄마, 엄마의 친구, 나. 셋이서 둘러앉아 과일 따위를 집어 먹고 있었다, 고 기억한다. 그러다 마치 우연처럼 우리 앞에 끌려 나왔던 이야기. 엄마의 친구분께서 운을 뗐다.
“나는 내 아들보고 네 아버지처럼 살면 큰일 난다 캤다.”
몇 가닥인가 말이 오간 후에 우리 엄마가 툭 던졌던 말.
“얘들 아빠는 나한테는 그렇게 못살게 굴었어도 얘들한테는 그렇게 안 했다.”
나는 그만 어안이벙벙해진다. 그랬었던가, 하면서. 아연함에 빠질 틈조차 허락되지 않은 내게 이다음 말들이 폭풍처럼 쏟아진다.
“아니 너는 자존심도 쎄서 절대로 안 졌을 것 같은데.”
“애들 잡고 협박하는데 어쩔 수 있나 무릎 꿇고 빌었지. 그래도 애들 교육에 안 좋다고 애들 보는 앞에서는 한 번도 안 그랬다. 밖에서 그랬지.”
강제로 낯선 사실과 마주한다. 아프다. 그 후로도 엄마 친구와 엄마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계속 오고갔고, 무심하고 담담한 말투 속에 섞인 폭력과 아픔과 슬픔이 대화 안에서 반복되고, 위로가 아닌 위로로, 달달한 과일 하나로, 말이 끝나듯 안 끝나듯 이어지다가 흐지부지 흩어진다. 스물둘인가 스물셋의 나는 말의 한가운데에서 말을 잃고 만다.
3.
스무 살의 여름이다. 더위가 한층 꺾인 여름날 밤, 주차장에서 집으로 엄마와 함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엄마가 놀이터 의자에 잠깐 앉아버렸기 때문에 나도 같이 옆에 따라 앉았었다, 고 기억한다. 마음이나 몸쪽은 어찌 됐건 간에 서류와 숫자로는 어른이 된 나에게, 엄마는 폭풍 같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쏟아낸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 엄마가 처녀였던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단다. 네가 유치원 다닐 때쯤 마당이 있고 1층이 있는 집에 살 때는 저런 일이 있었단다. 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 싫다고 한 이후에 엄마와 아빠 사이에는 그런 일이 있었단다. 이렇고, 저렇고, 그랬던 일들. 그 속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던 억압과 폭력의 언어들. 서류와 숫자로만 어른이 된 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문다.
4.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경험과 마주한다. 지하철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내 허벅지를 누군가 쓰다듬는다. 그를 피해서 아무 역에나 일단 내렸는데 뒤를 보니 따라오고 있다. 번호를 묻더니 싫다고 하자 선선히 물러난다. 한숨을 놓는다.
모임에서 술을 계속 먹이더니 어딘가로 데리고 가려 한다. 정신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싫다고 한다. 그는 내게 선택지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실갱이를 한다. 사소해 보이는 다툼 끝에 무사히 집에 돌아온다. 한숨을 놓는다.
그렇지만 한숨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운이 좋았음을 아니까. 한숨을 놓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잘 아니까. 이별을 고했다가 얻어맞아 병원 신세를 진 사람. 화장실에 갔다가 살해당한 사람. 한숨을 놓지 못한 채, 한 다발의 눈물 자국과 칼날을 품고 살았어야 할 사람들이, 엄마의 세대에, 딸의 세대에, 모래알처럼 많았음을 안다.
평소에는 그냥 짓밟고 지나가고 마는 모래알. 보지 않으려 하면 마땅히 보지 않을 수 있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앞만 보고 걸어가면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아래를 내려다보고 헤아리기 시작하면 그 아득함에 넋을 놓게 되는 모래알.
그랬구나. 엄마의 십 대 이십 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물어볼 수가 없어. 이런 일들이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남아 날 짓눌러. 이런 얘기를 엄마한테 할 수도 없어. 딸은 엄마의 꿈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는걸. 소중하게 키워온 엄마의 꿈이 이런 일에 시달렸다니. 엄마의 꿈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의 꿈인 나 자신이, 엄마가 꿈꿔왔던 걸 짓밟는 것만 같아. 엄마의 십 대와 이십 대에 있었을 법한 일이 나에게 그대로 일어났듯, 삼십 대와 사십 대, 오십 대의 수순을 그대로 밟을 것만 같아.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와. 이 길을 그대로 따라 걷지 말았으면, 했을 텐데.
미안해, 난 엄마의 꿈처럼 될 수가 없어.
5.
다시 시계를 돌려 2016년의 지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30대에서 50대 여성이 주로 이용하는 미국 거주 한인 여성 커뮤니티에 써 내린 활자들 속에서 엄마와 나를 발견합니다. 이 곳 뿐만이 아닙니다. 여성 커뮤니티에서도, 페이스북에서도, 영상에서도, 뉴스에서도, 책에서도, 심지어는 학술논문과 통계에서도 엄마와 나를 발견합니다.
엄마와 나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면 보이지 않았을 서사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하자 헤아릴 수도 없이 펼쳐져 있는 걸요. 돌연 아득해집니다. 슬펐다가, 화가 났다가, 동정했다가, 괴로워했다가를 반복합니다. 망설임 끝에 멀찍이서 활자로나마 마음을 꾹꾹 눌러씁니다. 꼭 현명한 결정을 하길 바라겠다고,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이 있다고, 함께 연대하겠다고.
6.
어떻게 보면 부럽습니다. 이런 감정과 연대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약함, 소외됨에 대한 감수성이 생겨날 기회 자체가 없었거나, 사유가 부족하거나, 앞만 보고 걸어갔던 사람들이. 무엇이 해일이고 무엇이 조개인지 자의적으로 정하고 퍼뜨리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에게는 조개이지만 우리에게는 해일일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게 말 한 꼭지, 단어 하나, 그림 한 장, 몸짓 한 번이라고 해도요.
우리는 연대할 겁니다. 우리는 아득할 정도로 많은 모래알이니까요. 이 해일을 다 흡수하고 우리의 삶을 개척해 나갈 겁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편협한 겁니다.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들이 운이 좋았던 것뿐이니까. 그렇지만 그들 주변에는 언제나 바다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우리가, 엄마와 딸이, 여성이, 연대할 겁니다.
원문 : Miso Kim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