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났다. 학창시절 심장 수술을 받았다. 세 번 받았다. 가슴에 인공 판막을 심었다. 종종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했다. 살고 싶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이 뛰고 있나 확인했다. 아직 뛰고 있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자신을 살려준 의사들이 고마웠다.
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꿈이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고 싶었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길이라 믿었다.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의사가 되었다. 진료실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다. 돌파하기로 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고 싶었다. 회사를 세웠다. IT 기술로 환자와 의사를 연결했다.
아팠던 남자와 아픈 이들을 살리고 싶어 한 남자. 이 두 남자는 ‘신승건’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갖고 산다. 그렇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진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공개할지 말지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심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진짜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간을 쪼개가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에 진실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이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세상이 몰라도 내가 아는데. 이제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조금 더 진실한 자세로 나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려고 한다.
10년 전,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바로 임상으로 가지 않았다. 임상은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만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나는 (인턴, 레지던트로 시작하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의 길을 가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의대생 시절 병원 안팎에서 보아온 그 어느 환자보다 나 스스로가 힘든 날들을 살아왔다. 그래서 두려웠다. 부지불식간에 다른 환자들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될까 봐.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다들 각자 나름대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길까 봐 걱정되었다. 내가 볼 환자들에게 내가 좋은 의사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임상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외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나 스스로가 주위에 병력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질병은 한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편견과 차별을 조장한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숱하게 경험했다.
내가 환자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들보다 더 아팠는데 저 정도는 견딜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저 정도로 아픈데 과연 믿고 함께 할 수 있을까’라고 미심쩍어 하는 것은 내가 평범한 의사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당시의 나는 장애물을 넘지 못했다. 남에게 편견을 갖고 싶지도 않았고 역으로 차별을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받기 싫은 대우를 남에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나 자신의 자존감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임상에서 진료를 보는 것을 접었고, 내가 아팠던 과거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환자를 보지 않는 길을 택했다. 대학원을 들어갔고, 또 사회에 나와서는 원격의료 IT 회사를 만들었다. 한동안은 꽤 만족했다. 혁신적이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세상에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와 함께 졸업한 동기들이 임상에서 환자들을 보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 동안, 나는 실제로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지 못했다. 하는 ‘척’만 하고 있을 뿐, 실제로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기여하지 않았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의사인 척 하며 주위에서 겉도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환자를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30대 초에 뒤늦게 병원 수련을 시작했다. 병원 수련을 결정할 즈음 의사의 본질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답은 명확했다. 의사란 ‘환자에게 도움을 주는 자’이다.
모든 직업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 존재가치가 있다. 그중에서도 의사, 판사, 변호사 등이 대표적인 전문가로 손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적으로 더 약한 상태에 놓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은 이들이 아니라 소외된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공의료를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국립중앙의료원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의사로서의 내 삶을 담담히 돌아본 이야기를 했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내가 점차 뜻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과거에 환자였던 시절을 잊고, 의사의 입장에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환자들을 기다리게 하는 상황에 부담을 점차 덜 느끼게 되었다. 환자의 건강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보다는 나와 동료 의료진을 보호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기도 했다. 이른바 방어적 진료라는 이유를 앞세워 ‘환자를 돕는다’는 의사 본연의 역할을 소홀히 하기도 했다. 때로는 몸이 힘들다는 이유로, 때로는 욕먹기 싫다는 이유로, 내가 환자였다면 겪고 싶지 않았을 상황에 눈감았다.
오래전 의사들이 밤을 새워가며 나를 살린 것과 같이 나도 누군가를 살려야겠다는 꿈, 그 꿈이 점차 빛을 바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찜찜함이 습한 바위에 낀 이끼처럼 두텁게 쌓여갔다. 본업에서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진심을 담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서평 쓰기를 그만두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내가 그것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진실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독서와 집필의 욕심을 내려놓았다.
머리도 식힐 겸, 지난여름 휴가에 나는 아내와 파주에 있는 지혜의 숲에 다녀왔다. 파주 출판단지 안에 위치한 지혜의 숲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출판사들로부터 기증받은 책들이 바닥에서 높이 트여있는 천장까지 사방을 둘러싼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도서관처럼 자유롭게 꺼내서 읽을 수도 있다.
그곳에서 거닐다가 우연히 벽에 걸려있는 <환자가 된 의사들>이라는 신간 포스터를 보았다. 표지에는 파란색 수술복에 흰 가운을 걸쳐 입고 자신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는 젊은 의사가 그려져 있었다. 구멍이 송송 뚫린 크록스 실내화까지. 사진보다 더 현실적으로 의사의 모습을 포착한 표지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 몰랐지만, 제목으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다. 후에 살펴볼 생각으로 제목을 기억에 담아두었다. 벽에 걸린 포스터로 처음 접한 이 책이 나의 의사로서의 정체성 고민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시간을 내어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환자가 된 의사들>
이 책은 정신과 의사 로버트 클리츠먼Robert Klitzman이 9.11 테러로 자신의 여동생을 잃고, 자기 자신이 우울증 환자가 된 일을 계기로 쓴 책이다. 정신과 의사에서 정신과 환자가 되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들을 깨닫는다. 클리츠먼은 자신의 경험에 더하여 70여 명의 다른 ‘환자가 된 의사들’과도 인터뷰를 하며 그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 이야기들을 여기서 다 열거하기는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자가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주관적인 시각을 갖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독서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의 시각에서, 클리츠먼이 인터뷰한 의사들의 몇 가지 특징이 인상적이었기에 이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우선, 그들은 병에 걸리기 전에 ‘자신들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갖는다. 명색이 남을 치료한다는 의사가 병에 걸린다는 것은 창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다.
한편, 환자가 된 의사들은 자신의 치료와 관련하여 사사건건 개입하려고 한다. 소위 말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주치의가 엄연히 있음에도 자신도 의사라는 생각에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의사들은 병원 직원들과 그들의 업무 체계를 알고 있으므로 그런 정보를 통해서 편익을 얻는다. 직간접적으로 아는 의료진들을 수소문하여 더 많은 배려와 관심을 끌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의사인 환자이기 때문에 의사가 아닌 환자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의사들은 환자가 되었을 때조차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자만심 때문이다.
그리고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또 다른 단계에 도달한다.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환자가 된 의사들’의 불안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만심과 불안감이 ‘환자가 된 의사들’ 본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환자가 된 의사들’이 보여준 불안감과 그것을 숨기기 위한 자만심. 과연 그것이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일까. 나이를 앞세우고, 지위를 앞세운 이 사회의 자칭 어른들이 보여주는 안하무인적 태도들. 이런 것들도 깊이 파고 내려가 보면 결국 그 밑바닥에 자만심이, 그리고 더 아래에 지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놓여있지 않을까.
반면에, ‘환자가 된 의사들’이 보여준 모습 가운데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다. ‘환자가 된 의사들’ 가운데 일부는 투병생활을 거치면서 환자들을 더욱 공감하게 된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자신이 의사로 환자를 치료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후회하는 의사들도 있었다.
‘환자에게 더욱 공감하게 된 의사들의 이야기’가 분량으로는 책 전체에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핵심은 짧고 단순한 법이니까.
나는 여기 주목했고, <환자가 된 의사들>을 읽으며 이제는 나의 진짜 이야기를 공개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그 초심을 다시 생각했다.
다시 ‘환자의 눈높이’로 되돌아간다는 것
‘환자가 된 의사들’의 인터뷰에 나타난 자아 성찰적 고백의 결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의사로서 걸어야 할 어떤 방향성을 찾게 되었다.
첫째, 환자의 입장에서 내가 하는 일을 바라본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병원은 언제나 끊임없는 기다림의 공간이었다. 수십 년 전 내가 겪던 상황이 지금도 그렇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환자의 시간보다 의사의 일정에 맞추어 돌아가는 병원의 현실. 우리 모두 숱하게 경험해 본 것들이다.
환자였을 때에는 의사를 기다리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의사로서 환자를 기다리게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환자일 때에는 제한된 정보와 부족한 경험으로 불안했지만, 지금은 의사로서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이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가 겪었던 불편함과 부당함을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겪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환자로서 병원에서 보낸 세월이 의사로 병원에서 일한 것보다 길다. 의사로서 배운 것 못지않게 환자로서 느낀 것이 있다. 그 경험들을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환자의 눈으로 내가 하는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의사가 될 것이다.
둘째,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는 부당한 권위에 맞선다.
여느 조직사회처럼 병원은 위계질서가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과정에서 오는 긴장 때문에 병원 내에서 이 위계질서는 더욱 강조된다. 상급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모든 상급자의 명령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상급자들조차도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고, 쉬는 것 좋아하고, 칭찬과 아부에 흔들린다. 그래서 병원 내의 상급자의 명령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 결정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환자에게 해가 되는 지시라는 것이 명백하면 나는 내 양심을 믿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한편으로, 병원에 존재하는 또 다른 종류의 부당한 권위도 있다. 금전적 이득에서 비롯된,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제약회사가 의사들에게 금전적인 이득을 제시하며 자사 의약품을 처방토록 회유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약을 써주시면 얼마를 드리지요.” 같은 식이다. 지금도 음지에서 어떤 의사들은 그런 제안에 넘어가는 것으로 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제약회사의 금전적 회유 때문에 쓸 약을 안 쓰거나, 안 쓸 약을 쓴다면, 그것은 결국 돈이 가지는 부당한 권위에 굴복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잉진료나 불필요한 수술을 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개적으로 발행되고 인터넷에 영원히 남게 될 이 글에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유혹들을 예외 없이 거부했다. 앞으로도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의사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보호해야 하는 의사의 본래 역할을 생각하며 이러한 권위에 맞서 왔다. 그 과정에서 억울한 상황과 겪지 않아도 될 피해도 기꺼이 감당했다. 하지만 옳은 길이라고 믿기에 후회는 없다.
부당한 권위는 다양한 얼굴로 다가올 수 있다. 상급자의 압력, 제약회사의 금전적 회유, 과잉진료, 불필요한 수술 권유 또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 그것이 어떤 것이든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셋째, 내가 의사로서 배운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않는다.
<환자가 된 의사들>에서 인터뷰한 의사들에게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자만심이다. 자만심이라는 우물의 밑바닥에는 불안이란 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자만심은 의사들로 하여금 ‘나는 병에 걸리지 않아’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하고, 환자들에게는 “나의 진료에 불만이 있으면 다른 의사에게 가세요.”라는 식으로 환자들이 다른 의견을 내놓을 가능성을 틀어막는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틀릴까 봐 불안해한다. 의사들의 불안감은 자만심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자신과 환자 모두의 건강을 해친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틀릴 수 있다는 위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역사의 모든 혁신은 당대의 불편부당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마주한 문제가 거북하다고 이에 눈감는다면, 그 순간은 무감각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진보나 혁신도 불가능하다.
요컨대, 나는 외과 의사로 살아가는 지금, 환자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다. 환자의 시선으로 돌아가고, 부당한 권위에 맞서며, 내가 배운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마음으로 변화에 열린 마음을 지켜가려고 한다.
나는 환자였다. 매일 밤 살고 싶다고 기도했고, 그 기도는 의사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 외과 의사가 되어 그들이 간 길을 걷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길을 떠나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어디에서 이 길을 시작했는지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의사가 있다. 잘하는 것도 다들 다르다. 훗날 누군가 내게 무엇을 잘하는 의사냐고 묻는다면, 나는 환자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의사라고 답하고 싶다. 환자에서 의사가 된 것이 나의 첫 번째 도전이었다면, 다시 환자의 눈높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두 번째 도전이다.
원문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