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인(私人) 박근혜가 원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라는 캐릭터는 ‘바비돌 신드롬’ 같은 게 있는 듯하다.
즉 번듯한 대학의 전자공학사이고 거대정당을 이끄는 중견 정치인이라는 커리어를 달성하는 것과 별도로, 그와 동시에 어떤 불가능한 미적 기준을 상정해 이 역시 진지한 달성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로써 못생긴 여성에게 부과되는 멸시의 화살을 방어하고 역으로 예쁜 여자에게 주어지는 유리함을 챙기겠다는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런 게 누구의 의지였을까? 근본적으로 그건 사인 박근혜 본인의 예뻐지고자 하는 바람이었을 수도 있다. 혹은 막연하게 사회 상식적으로 ‘그래야만 한다’고 여겨진 것을 착실히 내면화한 결과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새누리당에 의해 ‘과거 정권의 향수를 대표할 아이돌’로 기능하게 된 ‘육영수의 딸’이 져야 했던 비교적 명시적인 의무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전부 다거나.
(여성이 스스로 예쁘게 되고자 하는 신념은 종종 너무 깊이 내면화되어서, 애초에 누가 시킨 것인지 스스로도 알기가 어렵다.)
어쨌든 보통 바비돌 신드롬은 달성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쪽으로 분산된 개인의 시간과 능력은 오히려 멀쩡한 사회적 커리어의 측면에서조차 심한 손실을 불러온다. 그렇듯 박근혜의 그것도 지금 전형적으로 실패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 결과물들이 객관적인 비난거리가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그 비난이 꼭 ‘여성’이라는 것을 겨냥하려는 의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비판하려면 사실 이미 늦고도 늦었다.
박근혜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현상 자체가 페미니즘의 측면에서는 근본부터 패배고 비극이었다. 이제 와서 밝혀진바 이 여성정치인은 능력검증보다 순전히 이미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고, 또 어떻게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조차 소위 전형적인 ‘여성성’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혹은 그런 고전적인 여성성을 달성한 다음에야 온전한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는 지점부터가 심각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그럴 환경을 만들어놓고 유권자와 나아가 전 국민을 기만한 새누리당의 씻을 수 없는 죄이다.
지금 시민들이 보고 있는 것은 그 오래된 비극이 붕괴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 파편들은 모조리 박근혜가 ‘여자라서’ 잘못된 일처럼 보인다. 박정희 딸이라고 잘 봐줬더니 국정은 내팽개치고 외모만 꾸민다, 남자에게 빠져서 뭐가 옳은지도 모르고 세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 모두 흔히 말해지는 ‘여자의 비합리성’에 부합하는 이야기다. 일베충의 머릿속을 그려낸 듯 완벽히 해로운 ‘김치녀’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은 알고 있지 않나. 그러한 비난이 사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남자 사람들은 여자가 언제나 예쁘게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 예쁨이 어떻게 지루하고 힘들게 얻어지는지 이해할 생각이 없다. 여자는 으레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예쁘게 되어 나오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 못생겼으면 욕하면서도 성형 사실이 밝혀지면 싫어하고, 화장은 예의라고 말하면서 남들 보는 곳에서 하는 화장은 천박하게 여긴다. 월경과 임신은 사회의 재생산에 꼭 필요한 신성한 것이라면서 그 지저분함과 고통에 대해서는 점잖게 모르는체한다. 심지어 예쁜 여자는 배변 배뇨도 안 할 줄 안다는 게 알량한 환상이고 로망이라니, 여자를 좋아하는 것 이전에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삭제되어 있지 않은가.
건강을 해칠 정도의 몸무게를 얻어라. 유전적으로는 거의 태어나지 않는 얼굴형, 체형을 얻어라. 나이가 들어도 추하게 늙지 말라. 그런 요구에 응답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도, 큰 위험을 지는 일인지도 모르는 채 결과적으로 예쁘게 되어 있는 여성의 이미지만이 사회에서 환영받는다. 그러면서도 그 ‘예쁜 여자 사람’이 인간으로서도, 남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커리어를 빈틈없이 해낸 다음에야 한 명의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 불가능한 이중 목표에서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현실의 여성을 보면 손쉽게 비난하고 멸시해버린다. 주사를 잘못 맞아서 얼굴이 띵띵 부었다. 남자에게 사랑받으려고 비아그라를 박스로 산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예뻐지려는 시술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쓴다.
그렇다면 일견 바보 같아 보이는 ‘바비돌 신드롬’이라는 것은 그런 손가락질에 대한 당연한 방어 노력이 아닌가. 불가능해서 결국 파멸할 선택이라 하더라 할지라도. 예뻐지라고, 그런데 어떻게 예뻐졌는지는 절대 티 내지 말라고. 지겹도록 우리 여성들을 옥죄는 모순이었다. 아주 익숙하다.
누가 박근혜에게도 ‘감히’ 그 파멸일로를 강요했지는 모른다. 설마 어떤 개인은 아니겠지. 또 누가 하란다고 한 박근혜는 도대체 한 여성이자 권력자로서 얼마만큼의 좆밥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해방시켜주기를 바란 유권자들이 많을 텐데, 오히려 ‘그녀’는 기대를 저버린 채 더욱 단단한 코르셋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대통령 자리라는 게 어떤 것인가. 남들보다 두 배로 늙어가며 스트레스받고 큰 결정을 하고 큰 책임을 지는 자리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앉은 사람이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은 모르겠고 아이돌 노릇이나 하는 게 괜찮다고 하는 희한한 인식과 세력이 청와대와 새누리당과 유권자들과 이 사회 전체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시민사회에서 행해지는 다른 어떤 여성혐오적 표현보다도 이 근원에 가장 크게 분노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박정희의 ‘아들’이었으면, 아니면 딸이었더라도 외모가 추했으면, 육영수와 안 닮았으면 그렇게까지 능력 검증을 안 할 수가 있었을까.
처음에 박근혜가 당선될 때는 나도 약간의 체념을 했었다. (아무리 대통령이 내 눈에는 멍청이 해삼 말미잘처럼 보여도) 그래도 51%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다. 여당의 경선을 통과한 사람이다. 나 말고 다른 국민들이 전부 눈 뜨고 코 베일 등신은 아닐 것이고, 오랫동안 당대표씩이나 한 인물이면 모르긴 몰라도 무슨 능력이 있으니까 저 자리에 있는 것이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박근혜라는 무능한 사인은 그러고 보면 단지 자신에게 부과된 기대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아무 생각이 없었든— 이제 와서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결과가 말한다. 그게 썩 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외모적으로는 아직 근혜 예쁘다 하는 할아버지들이 있나 모르겠는데, 그걸 대가로 나머지 사람들에게만 맡겨놓은 국정 측면에서는 너무도 명백히.
‘여성 대통령’의 처참한 실패다. 그 시작부터 ‘여성’은 실패하고 말았다.
2.
덕택에 수많은 ‘불편한’ 워딩이 돌아다닌다. 강남아줌마, 저잣거리아녀자, 무슨 년, 성형중독, 대머리 성애하는 탕녀, 미스박까지 가세한 모양인데.(이는 3에서 후술하겠다.)
하지만 시민 개개인들이 이것이 어느 선까지 옳은지, 그른지,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따지자면 다 나쁘지. 정도의 차이일 뿐. 혹은 공인으로서 사생활에 세금을 유용했다면 공공선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비난의 영역이 있을 뿐.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사적인 부분까지 들춰내어 인격 모독적인 비난을 가하는 건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그래서 저 박근혜를 어떻게 그만두게 할 것인가?
정책으로 공격하는 것은 그 효과가 매우 의문스럽다. 취임 이래 무능으로 이미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살한 뒤 거기에 엉덩이 비빌 줄 아는 뻔뻔한 정권이다. 사실 그것은 박근혜의 탓도 아닐지 모르고, 설령 자기 탓이라 할지라도 유체이탈해버리면 그만인데 대통령에게 무슨 인간적인 수치심과 책임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겠는가.
실책을 공격하는 것은 공허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을 위시한 새누리당 정권이 시민들로 받은 정당성은 어떤 정책이나 유능성에 기댄 것조차 아니었다. 그저 박정희-육영수의 후계자라는 이미지, 박근혜라는 자연인이 날 때부터 타고난 그 후광만 유지된다면 어떤 실정에도 정권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돌파하려면 저 허상적 이미지를 깨는 수밖에. 매우 치사하지만 박근혜라는 사인의 캐릭터를 개박살내지 않으면, 현재의 새누리당은 인간의 논리를 영원히 들어 처먹지 않는다. 어이가 없지만 이미 그렇게 정권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언제부터? 그건 잘 모르겠다. 박근혜가 정계에 재등장했을 때부터일 수도 있고, 박정희가 이 나라에 지울 수 없는 경제발전의 그림자를 드리운 그때부터 이런 씨앗은 잉태되었는지도 모르지.
여하간 그 개박살을 위해서 박근혜라는 기존의 브랜딩이 얼마나 기형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는지를 가장 더럽고 치졸한 부분에서부터 폭로하는 것이 요즘의 상황 되시겠다.
현재 시세에 제일 전략적으로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는 건 JTBC 손석희 사장이 아닐까 하는데, 그쯤 되는 언론이나 정치 네임드들이 무슨 공개 발언을 할 때는 대중에게 기대하는 대략적인 반응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단일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요즘처럼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얽힌 시대에 대중을 다루는 일은 필패할 수밖에 없고, 그건 전략이라고 부를 수준도 아니겠지.
어떤 떡밥이 언론을 통해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을 때, 거대하고 무분별한 대중의 반응이 어떤 스펙트럼 하에 존재할지는 예상하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설계된 ‘예상범위’를 넘어서서 시민사회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을까? 반응 중에 무슨 언피씨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시민들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예상된 톱니바퀴 중 하나이다. 누가 자정하거나 변화시키려 해도 그것은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릴 테다. 이 사회가 지금 바로 현재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인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프로 언론인, 정치인들은 더욱 잘 알 것이다. 그들은 대중을 구성하는 상수값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할 뿐이고, 우리 같은 대중들은 상수 안에 있는 대상들이다.
손석희는 물론 JTBC를 여성 친화적 언론/기업으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최순실의 셀카를 보여줄 때부터 이미 이 사회가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 등의 여성성을 얼마나 저열하고 적나라하게 씹고 뜯고 헤집을지 예상을 다 했음 직하다. 그러니까 시민사회의 반응으로 일정 부분의 저열함이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 계획에서 어그러지는 일이 된다.
하나도 놀라운 일은 없었다. 그저 기존 사회에 내재한 ‘여혐’을 ‘일정부분 정의로운 방식’으로 표출해도 된다는 판이 깔려 있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일부 시민들이 있다는 것이다. 막을 도리가 있겠나.
그렇다면 정치언론의 대중에 대한 이러한 조종은 옳은가? 선한가?
선악과는 상관이 없다. 경향에서 기사를 썼듯, 사람들은 그저 매일 하던 여성혐오의 화살을 박근혜에게 돌림으로써 손쉽게 정의감을 획득하며 정치 풍자 드립이나 치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게으르고 무책임하다고 성토해봤자 어차피 대다수의 ‘안 불편한’ 사람들은 쉽고 편한 것을 좋아한다. 정크푸드나 옐로 저널리즘, 양산형 판타지 소설처럼.
그 사람들이 갑자기 대오각성해서 오오올바른 방법으로 박근혜를 준엄하게 비판하는 것을 어느 시점에라도 기대할 수 있을까? 누가 그렇게 만들 수 있는가? 아마 5년, 10년 내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에 의한 정권심판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뿐이다.
안타깝게도 대중을 계몽하는 것은 대중을 조종하는 것보다 어렵다. 조종은 대중이 원하는 먹이(이는 어느 정도 뻔하다)를 던져줌으로써 가능하지만, 계몽은 어느 걸출한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적 토대가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대중이 스스로 한다. 단기간에는 더더욱 힘들고, 영원히 완벽이라는 것은 없기도 하고.
그러니 지금 이미 한쪽으로 ‘잘 조종당하고 있는’ 소용돌이 안에서, 다른 누군가가 맞조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가 바라는 ‘계몽’을 얻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기도일 것이다.
3.
당연히 작용과 부작용이 있다.
꼭 들어맞으라는 보장은 없지만 야당의 거물급 정치인들이나 손석희 등 언론인들이 미리 계산한 바는 있을 것이다. 여차한 부작용이 날 것인데 그것이 자기가 만들려는 대세에 큰 영향이 없다고 판단했으니 이같은 일을 결행했을 것이다.
2에서 전술한 현상을 성공적으로 반영한 노래를 DJ DOC가 냈다가, ‘페미당당’의 시위 보이콧 선언을 의식한 주최 측에 의해 공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제껏 시민사회에서 명시적/묵시적으로 횡행한 여성혐오의 저열한 수준에 비한다면 <수취인분명>에 대한 해프닝은 거의 트집이라고 생각될 만도 하다. 따지자면 여태 ‘정의롭다고 허용된’ 여혐에 피로감을 느낀 페미니즘 사회가 우연히 이 지점에서 터진 것일 수도 있다.
미스박, 미스김, 미스최.
그게 온전히, 특별한 직함이 불명인 미혼 여성을 존칭하는 언어이기만 하다면야 Ms.가 아니라 과거의 성차별적 영어인 Miss를 선택한 무심함 정도를 탓할 수 있을 뿐이다. DOC의 평소 행적으로 볼 때 그 부분을 미리 고려해줄 거라고 기대를 가지는 쪽이 나쁘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그 지점을 넘어 기분 나쁘게 들릴 여지가 있는 것은, 박양 김양 최양 등이 커피카피 아가씨를 하던 시절이 그리 옛날이 아닌 이유이다. 그리고 다방에서 미스김 찾던 개저씨들이 아직 살아서 똑같은 단어를 공유하고 있는 이유이고, 비록 이제 미혼의 여성 경제활동인구가 미스X라 불리거나 커피카피나 하고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해도 우리 ‘미스’들은 앞으로 더욱 인간답게 높아져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언감생심 대통령을 했는데, 그조차도 실은 허상이었고 이제 막 일개 ‘미스’로 전락 당한 참이다.
미스라는 호칭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자. 같은 한국어를 말하고 살지만 특정 단어-특히 호칭에 대한 인식은 가끔 개인 간에도 건널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경험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고 개인에게만은 절대적이다.
누군가는 아가씨라 불리면 얕보이는 것 같고, 누군가는 여사라 불리면 양아치가 수작거는 것 같다 한다. 선생님과 사장님 중에 제 구미에 맞는 것을 불러드리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소수자를 칭하는 각종 멀쩡했던 단어들은 아무리 갈아치워도 계속해서 비칭으로 변한다.(다문화가 욕이라니…) 그런 한편 그 당사자들은 자신을 멸시하는 단어를 오히려 전복적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기도 한다.
그 정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호칭의 가불가에 대해 쉽게 단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디 미스X를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기 바란다. 원래 그런 것은 없어야 한다고 ‘대의’를 위해 찍어누르지 말기 바란다. 닥칠 수는 있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미스X가 기분 나쁘다고 해서, 누가 자기 작품에 쓴 미스-에 굳이 맥락외적인 의미부여를 할 이유도 없다. 그게 기분이 나쁘다면 그냥 이 사회의 여성인권 수준을 탓할 일이다. 물론 DOC가 역사적으로 페미한테 밉보일 짓을 한 그룹인 건 사실이지만 그 사회 전체의 잘못을 워딩 하나로 뒤집어쓸 정도로 대표성이 큰 건 아니지 않은가.
충돌이 어느 쪽으로 발산하든 지금 단계에서는 해프닝일 것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되었으리라. 페미가 시위에 나오지 않았더라도, 시위의 규모가 좀 줄었을진 모르지만 시위가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DOC가 노래를 못 불렀다고 해서 큰일이 난 것도 아니다. DOC는 침착하게 ‘그게 아니고요’를 시전하며 촛불 일반참가를 했다. DOC 노래가 듣고 싶으면 그냥 유투브에서 들으면 된다. 유투브 조회수 많아지면 심지어 음원 무료공개하신 그분들이 돈도 번다(…)
사회적 현상을 논할 때 그 규모라는 것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진정 큰 흐름은 마치 대기처럼, 혹은 해류처럼, 작은 바람이나 물결 같은 것과 섞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간다.
국민의 95%라는 수치를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나? 시위 참여자 백만 명 이백만 명, 그것도 많다고 하겠지만 사실 부산시민만 350만 명이다. 350만명의 광역시에서 지역구 의원은 18석 나온다. 큰 것 같나?
전국에 있는 페미 액티비스트 다 합치면 몇 명 될까? 뒤에서 나처럼 키보드질하는 넷페미 수는? 아 애초에 이 땅에는 젊은 여자들의 수 자체가 너무나 적다. 또 한편 이 시국 끝날 때까지 DOC 노래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 수는 어떤가? 세대를 건너가면 과연 그런 스타일의 노래가 인기 있을까? 만일 그걸 팔았다고 한다면 백만 장 팔면 아주 많이 판 것이겠지?
대략 국민의 95%라는 숫자와는, 어느 것이든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SNS 찻잔 속의 폭풍은 현실 정치에서 많은 경우 한 자릿수의 퍼센트로 나타나 왔다.
물론 이러한 작은 물결, 작은 해프닝들은 지금 그렇다는 것이지 나중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미리 그때를 걱정해서 이 총체적인 해프닝들을 원천봉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95%. 사람 머릿수라고 생각하면 사천구백만 명이다. 사천구백만 명이 마음속에 한 가지의 똑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 글 보는 진보나 페미 중에, 한 몇백 명 천 명 동료 모아서 사천구백만 명 마음을 한 가지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있나? 하려고 기를 써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댓글로 열심히 싸우는 것이 다 나름대로는 심각한 투쟁이지만, 사천구백만의 시선으로 보면 그저 한 구석에서 투닥거리는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투쟁이 범국민적으로 퍼져나갈 확률은 SNS에서만 인기 있는 젊은 군소정당 후보가 당장에 국회의원에 당선될 확률만큼이나 낮다. 뭐, 언젠가 20년이나 30년쯤 후에 될지는 모르지. 그건 그때 일이고.
역사라는 것은, 그렇게 거대하게, 혹은 사소하게 꾸역꾸역 흘러가는 물건인 것 같다.
그러니까 조급함을 내려놓자. 깊게 대화를 하자. 가치관과 시각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인격을 말살할 듯 배척하고 공격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상대방 뇌를 열어 뜯어고치지 않아도, ‘우리’는 망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