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단어가 있다. 어떤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공유하던 관념, 사고방식, 믿음이나 이론적 전제 같은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혹은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태어난 시대와 환경의 특성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할 때가 있다. 모든 사건은 맥락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맥락을 떼어놓고 사건만 이해하려다 보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디테일이나 오해마저 생기는 경우가 많다.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
이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는 1856년부터 1939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의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한 세대가 흘러가는데 30년이 걸린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프로이트는 우리 세대의 고조할아버지 뻘이다.
그가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 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새로운 소식은 종이신문을 통해서 전달되었고, 전화도 보편화되지 않아서 모두들 편지로 사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 편지조차도 지금처럼 하루 만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며칠, 조건에 따라서는 몇 주일 걸려서 전달되곤 했다.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국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으며,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이는 여러모로 아주 명확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산업구조가 느리게나마 변화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했다. 의학과 과학 분야에서는 루이 파스퇴르 이후 여러 학자들이 세균과 질병의 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페니실린조차 발명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요컨대, 이 시대 사람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았다. 거의 모든 면에서 달라서 우리는 그들이 살던 세상이 정말로 어떤 곳이었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시대를 알아야 이론이 보인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직접 쓴 책을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나 역시 학부시절에 그 유명하다는 <꿈의 해석>을 조금 읽어본 정도가 전부다. 물론 독일어 원서는 아니었고, 독일어 원서의 일본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었다. 심지어 세로쓰기로 편집된 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원문보다는 그의 이론을 정리한 2차 저작물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접한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다. 오랜 임상경험과 강연, 토론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듬어져온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을 직접 읽는 것보다는 그를 연구한 후대 학자들이 알기 쉽게 현대적인 문체로 정리해준 해석본을 읽는 것이 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그의 이론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구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살던 시대상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대개는 그들이 살던 시절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프로이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사실상 프로이트의 시대, 빅토리아 왕조시대라고 불리우는, 이성에 대한 맹신과 감성에 대한 억압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던 그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 그의 이론이 태어나던 상황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따라서 그의 이론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된다.
츠바이크가 본 프로이트의 시대
<프로이트를 위하여>는 프로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소설가의 작품이다. 책의 절반 가량인 1부는 그가 프로이트를 소재로 쓴 평전이라고 보면 되고, 나머지 2부는 실제로 츠바이크가 프로이트와 교류했던 편지 모음이다.
이 책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느낌을 줄 것이다. 처음 이 책을 펴면 첫 페이지부터 프로이트에 대한 열광과 흥분으로 가득한 장황한 문장들이 들이닥친다. 이 책에서 단문은 찾아볼 수 없다. 예전에 국어를 배울 때 만연체라고 배웠던, 쉼표를 통해 연결된 복문, 혹은 이중복문이 대부분이다. 글자수가 좀 많아지면 압박감을 느끼며 “닥치고 세줄요약”을 요구하는 요즘 세대의 입장에서는 이런 문장들을 버티어내기는 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체 자체가 프로이트의 시대를 보여주는 창문이다. 당시엔 지금처럼 글을 쓰면서 이리저리 편집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가 없었다. 모든 문장은 머릿속에서 조립해서 단번에 실수 없이 써내려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 시절에 글을 잘 쓴다는 건 복잡하고 긴 문장을 앞뒤가 맞게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
처음에 느껴지는 장벽은 문체만이 아니다. 내용도 문제다. 초반은 도대체 이게 정신분석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고대의 주술과 종교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츠바이크가 장황한 문장으로 묘사한 그 신비주의와 주술 이야기를 지나고 나면 봉건과 근대가 뒤섞인 프로이트 시대의 강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당시는 막 세균을 발견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세포와 신경계의 역할에 눈을 뜨고, 몇몇 의학기술이 지금까지 불치라 여겨지던 질병을 치료하면서 과학이 힘을 얻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이런 초보적인 발견에 고무된 사람들은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균이나 기관의 기능만 알면 되지 그 인간의 삶과 환경을 알 필요는 없다는 극단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버린다. 이는 “전신질환은 없다. 기관질환이나 세포의 질환만 있을 뿐이다.” 라는 말로 대표된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인간을 이성적인 기계로, 질병을 기계부품의 이상으로 이해하려는 이런 관점이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의 정신이었다.
이 시대에는 이러한 이성적인 세계에 방해가 되는 모든 감성적인 요소들, 특히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부글거리는 욕구들은 아예 무시하거나 공포심을 주입하며 억압했다. 그 결과 프로이트가 주목한 히스테리 증상들이 도처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기에, 심리적인 치료법이 명백한 효험을 발휘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츠바이크가 언급한 파라켈수스나 크나이프, 갈스파흐의 기인이라고 불렸던 발렌틴 차일라이스 같은 유사 의학자들이 명성을 떨쳤다.
그들이 사용한 기술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부분이 최면술, 암시,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하다. 그런 조악한 기술로도 엄청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의 불균형이 심각한 상태였던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의 억압 때문이었다.
프로이트 시대의 의사들도 이렇게 뚜렷한 신체적 원인이 없이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들을 접하면서 그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라고 추정하기는 했다. 그들 중에서 통찰력이 있는 몇몇은 그 심리적 원인이 성욕과 관련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발설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안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츠바이크는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의 이론, 어떤 신체적 질병의 기저에는 심리적인 원인이 존재하며, 그 심리적 원인은 결국 억압되거나 뒤틀린 성욕이라는 주장이 학계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생생히 묘사한다. 그는 볼드모트의 이름을 함부로 내뱉던 해리포터처럼, 눈치 없는 국외자였고, 모두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요인이었다. 적어도 츠바이크는 그렇게 말한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편지를 통해 반박을 하긴 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이 당대에 미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비엔나 의대의 정교수가 되지 못했던 것은 츠바이크의 해석이 황당무계하지만은 않음을 시사한다.
현대인들 중에 당시 프로이트가 접했던 것과 같은 신경증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거의 없다. 21세기 한국에서 아무리 심리적, 성적인 억압이 심한 가정이라고 해도 프로이트 시대의 평범한 가정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플라시보 효과는 존재한다. 실제로 자석요나 자석 팔찌를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효험은 매우 미약하다. 억압된 심리적인 욕구의 절대량 자체가 프로이트의 시절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프로이트가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정신분석학이 아닌 전혀 다른 이론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분석학 덕분에 인류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지평을 얻었고, 그 덕분에 지금처럼 우리가 상대적으로 훨씬 억압이 적은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여행을 위한 훌륭한 통로, 츠바이크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다윈의 진화론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맞먹는, 서구 문명사의 3대 사건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이유를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나머지 두 이론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역시 당시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들을 한 번에 설명해주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했다.
지금 우리로서는 경험할 기회도 없었던 증상에서 통찰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엄정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의 세계에 대한 지도의 바탕을 완성한 선지자가 프로이트였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프로이트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럽사회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여행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고색창연한 만연체 문장이 그 시대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소품이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지나치다 싶은 문장들도 보인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반의 거칠고 낯선 고갯길을 어떻게든 넘기고 나면 조금씩 길이 평탄해지며 익숙한 길이 나올 테니, 조금만 참으시라. 나중에는 오히려 그 문체가 편안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서평이 불필요하게 장황한 이유도 아마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전염된 만연체의 효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