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New Yorker에 올라온 「AN AMERICAN TRAGEDY」를 번역한 글이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된지(정말 타이핑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다) 얼마 안 있어 올라왔다. 트럼프에 반대했던 미국인들의 분노와 절망을 잘 보여준다. 문장이 매끄럽게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좀 있는데, 쓸데없이 문장이 어려운 뉴요커 탓 내 부족한 번역 탓이다.
1.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공화국의 비극이자 미국 헌법의 비극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국내외의 이민배척주의, 권위주의, 여성혐오, 인종차별주의 세력들의 승리다.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럼프의 충격적인 승리는 미국과 대의제 민주주의 역사에 불쾌한 사건이다.
2017년 1월 20일, 우리는 최초의 아프리칸-아메리칸 대통령(그는 성실하고 품위 있고 관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에게 작별을 고하고, 외국인 혐오자들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지지를 거부하지 않은 협잡꾼의 취임식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순간에 강한 반감과 심대한 우려를 표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다가올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점차 보수적으로 변할 것이고, 우파 의회는 대담해질 것이다. 여성과 소수자들을 멸시하고, 시민 자유와 과학적인 사실을 경멸하는 대통령은 그 어떤 품위 있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증명될 것이다.
트럼프는 고삐 풀린 천박함과 무지를 보여주는 국가 지도자다. 그는 시장을 곤두박질치게 만들뿐만 아니라, 약자들의 가슴에 공포를 아로새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가 크게 모욕한 다양한 많은 타자들의 가슴에 공포를 각인할 것이다. 여기서 아프리칸-아메리칸은 타자다. 히스패닉도 타자다. 여성도 타자다. 유대인과 무슬림도 타자다. 이 견디기 힘든 사건과 앞으로의 시간들을 바라보는 가장 희망적인 방법은 이 선거와 앞으로의 수년간을 미국 사회 제도의 내구력과 취약함을 테스트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진지함과 결심을 테스트하게 될 것이다.
선거일 오전만 해도 여론 조사에 걱정할 거리들이 있긴 했지만, 펜실베니아, 미시간, 노스캐롤라이나, 심지어 플로리다까지도 민주당에게 충분히 낙관적인 뉴스를 전해줬었다. 세네카 폴스(역자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최초의 집회)의 성취, 즉 백악관에 입성할 최초의 여성 대통령 당선을 축하할만한 이유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조지아 같은 주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1주일 전쯤 F.B.I. 국장이 의회에 보낸 부주의하고 해로운 편지 때문에 사라졌다. 그 편지에는 ‘이메일’, ‘앤서니 위너’, ’15살 소녀’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이 재등장했고, 수사를 다시 하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가망은 여전히 힐러리 클린턴에게 있었다.
처음부터 언제나, 트럼프는 급진적 우파의 모든 부패함을 반영하는 비뚤어진 캐리커처 같았다. 그가 우세해지고, 이번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은 영혼에 강한 타격을 남긴다. 이 사건은 우리가 아직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불확실성 속으로 미국을 던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상대적 다수의 유권자들이 허영과 증오, 거만함, 거짓말, 무모함, 민주적 규범에 대한 경멸로 점철된 트럼프의 세상에서 살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다양한 면에서 우리를 틀림없이 국가적인 후퇴와 고통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다가오는 며칠간, 논평가들은 이 사건을 정상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들은 ‘본질적인 지혜’와 미국인들의 ‘기본적인 품위’에 대한 얘기로 자신들의 독자와 시청자들을 진정시키려 할 것이다. 그들은 드러난 국가주의의 독성을 경시하고, 금으로 뒤덮인 비행기를 탄 채 피와 땅(역자주: 인종을 혈통과 지역으로 구분한 나치의 이데올로기)이라는 포퓰리스트의 수사를 사용하는 남자를 추켜세우고만 잔혹한 결정을 경시할 것이다.
가장 대담한 논평가인 조지 오웰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생각은 선천적으로 현명하지 않다는 지적을 했다. 그 지적은 옳다. 사람들은 개인일 때와 마찬가지로, 모였을 때도 어리석고, 무모하고,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때때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통속적인 승리를 위해 분노의 파도를 읽고, 그 흐름에 탑승한 교활한 선동가가 전부다.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 <공원의 자유>에서 이렇게 썼다.
핵심은 우리가 향유하는 상대적인 자유가 대중 여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법은 보호막이 아니다. 정부는 법을 만들지만, 그 법이 이행되는지의 여부와 경찰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국가의 일반적인 기분에 달려 있다.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에 관심을 가진다면, 법이 금지한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대중 여론이 게으르다면, 법이 그들을 보호한다 할지라도, 부자유한 소수자들은 박해받을 것이다.
2.
트럼프는 수백만 투표자(주로 백인 투표자)이 갖고 있는 ‘강탈당했다는 느낌’과 불안을 탐지하면서 선거 캠페인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들 투표자들의 상당수가 트럼프를 따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트럼프를 ‘한때 상대적으로 별 볼 일 없었지만 정계로 오자 우스꽝스러운 8, 90년대 뉴욕에서 자수성가한 변방의 익살꾼이 된, 재치있는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트럼프가 자신들의 분노와 격정, 자신들의 관심에 반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느낌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가 평판이 낮은 억만장자라는 사실은, 보리스 존슨과 다른 많은 이들의 냉소적 말투에 영국의 브렉시트 찬성자들이 단념하지 않았던 것처럼 미국의 투표자들을 단념시키지 못했다. 민주당 유권자들은 비록 균등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대불황에서 대체적으로 회복되어 왔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업률은 4.9%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들을,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심대하게 저평가하게 만들었다. 또한 민주당 유권자들은 아프리칸-아메리칸 대통령의 당선과 동성 결혼의 합법화, 비슷한 다른 지표들로 인해 문화 전쟁의 끝에 다다랐다고 믿었다.
트럼프는 멕시코 이민자들이 ‘강간범’이라고 선언하면서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시온 장로 의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반유대주의 광고로 캠페인을 마쳤다. 그 자신의 행동은 여성의 몸과 존엄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을 받을 때면, 그 비판들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치부하며 몰아세웠다.
확실히 그런 가차 없는 역행적인 방식이 몇몇 유권자들에겐 먹히긴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지독한 음모론을 모아놓은 브레이트바트 뉴스가 수백만 개의 뉴스와 주류 의견의 출처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선거 캠페인을 브랜딩 실습 정도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은 트럼프는 곧 자신이 이 어두운 세력을 조종하고 구체화할 수 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조지 H.W. 부시부터 밋 롬니까지, ‘전통적인’ 공화당원이 트럼프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트럼프에 대한 감정적인 지지를 더 깊게 만들뿐이었다.
논평가들은 이 비극을 정상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FBI의 쓸데없는 유해한 행위와 러시아 정보기관의 해로운 간섭, 케이블 텔레비전이 트럼프에게, 특히 선거 캠페인 초반에 준 프리 패스(그의 랠리를 보도하는 직접적이고 방해받지 않은 수시간)를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드는 방도 또한 찾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 사회 제도의 안정성에 의지해야 할 것이고, 공직에 취임한 가장 급진적인 정치인들에게서조차 스스로를 제어하길 바라야 할 것이다.
흡사 많은 민주당 투표자들이 빈곤이나 노력, 불운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들은 괴로움과 단절된 채 독선적이라는 경고를 받게 될 것이다. 이 무가치한 말들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트럼프와 그의 동료들(크리스 크리스티, 루돌프 줄리아니, 마이크 펜스 그리고 맞다, 폴 라이언도 있다)이 전통적인 품위의 경계 안에서 공화당원으로서 통치할 거라고 믿을 이유 또한 없다.
트럼프는 품위와 공정함, 중용, 타협, 법의 규율이라는 연단 위에 있다가 당선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로 분노의 무대 위에 있다가 당선됐다. 파시즘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지만(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는 분명 파시즘이 시작하는 방식이다.
3.
힐러리 클린턴은 결점이 있는 후보였지만, 역경을 극복할 능력이 있고 똑똑한 경쟁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하지만 클린턴은 수백만 투표자들 사이에서 불신과 자격 없음의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들 중 몇몇은 연이은 가짜 ‘스캔들’이 수년간 계속 확대되면서 내면으로 자라난 의심의 싹 때문이었다.
여하튼, 공공 분야에 대한 그녀의 성실한 헌신이 얼마나 크고 오래됐는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의 고객과 투자자, 계약자들을 속인 협잡꾼, 트럼프보다 덜 신뢰받았다. 알맹이는 텅 빈 트럼프의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행동이 한 인간으로서 그의 꼴사나운 본질을 반영한다. 그 본질은 탐욕스럽고, 정직하지 못하고, 편협하다. 그의 자기중심적 성향 수준은 임상적 환경 밖에서 거의 드러내보여지지 않았다.
8년간 미국은,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두고 살아왔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이버 스페이스 아래에서 끓어 넘치는 인종차별주의와 분노를 축소시키려 했다.
하지만 정보의 고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페이스북에서 전통적인 팩트 기반의 기사는 대안 우파 매체의 음모론적 기사와 똑같이 보인다. 고약한 이들의 대변인은 이제 수많은 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는 대단히 많은 여성 혐오적 언어로 가득 차 있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황으로, 클린턴을 파괴하고 그녀의 품위를 손상시키는데 도움이 됐다. 대안 우파 언론은 트럼프가 선거 유세 기간 동안 산소처럼 사용한, 끊임없는 거짓말과 프로파간다, 음모론의 조달자였다. 브레이트바트의 중추적 인물인 스티브 배논은 트럼프의 선전자이자 캠페인 관리자였다.
모든 그림이 우울하다. 지난 늦은 밤 마지막 주에서 결과가 나왔을 때, 한 친구가 내게 슬픔에 가득 차 갈등과 전쟁에 대한 걱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미국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절망은 해답이 아니다. 권위주의와 싸우고, 거짓말과 맞서고, 미국의 이상을 멋지게, 그리고 맹렬하게 쟁취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남은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이다.
원문 : Yoon Ji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