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글은 본 매체에서 발행된 <폭력과 비폭력: 민주노총의 청와대 집회를 앞에 두고>에 대한 반론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들어가며
11월 12일 집회에서 민주노총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신고를 했고, 그렇게 진행되었다. 물론 박근혜 퇴진 투쟁의 현재 시기에 평화적인 기조를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대규모 집회에서의 ‘폭력 유발’을 경계하는 글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정세에 있을 때 굳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대중의 참여를 제약하여 관객으로 만들 뿐이다. 무절제한 폭력은 독재정권에게 역선전의 빌미를 주고, 따라서 대중들의 지지를 약화시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낮은 수준이라도 대중이 쉽게 동참할 수 있는 평화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 <87년 6월 항쟁,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다>, 유기홍
위 글에서 인용된 문장에 매우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경계가 되는 것은, 위에 동조할 때 생길 수 있는 몇 가지 함정 때문이다.
1. 민주노총은 폭력조직이다?
일단 ‘민주노총이 습관적인 투쟁 성향을 보인다’는 마지막 문단에 대해 생각해보자.
197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날이다. 민주노총은 그 날을 맞이하여 가까운 주말에 매년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도 마찬가지로 오후 2시에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이 날은 5월 1일 노동절과 더불어 가장 많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집회를 나오는 날로, 최소 10만 명 이상이 모인다.
즉 1년에 노동절 말고는 처음으로 집회 나오는 조합원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 올해 처음으로 집회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폭력조직이 아닌,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다. 제 아무리 민주노총 지도부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집회에서 과격한 전술을 쓰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물론 ‘박근혜 퇴진’이라는 전 국민적인 열기가 있지만, 청와대로 쳐들어가기 위해서 경찰과 충돌을 자처하고 차벽을 때려 부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작년 민중총궐기 얘기를 많이 하는데, 경찰이 초법적으로 광화문광장으로 행진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않았다면 그런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박근혜 퇴진’이란 구호를 외치면서 청와대 앞까지 가는 행진 신고를 냈다고 하여 곧바로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이런 편견을 가진 언론인들이 ‘민주노총=폭력조직’이란 프레임으로 보도를 한다면 국민들도 민주노총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노동조합에 대한 국민적 정서가 괜히 나쁜 것이 아니다.
2. 집회 및 시위에 대한 제한은 가능하다?
대한민국 헌법에 근거하면 집회 및 시위는 ‘허가’의 개념이 없다. 집회 및 시위는 절차에 맞게 신고만 하면 된다. 집회 및 시위를 하는 것은 공기나 물처럼 항상 존재하는 권리인 것이고, 법률에 근거해서 예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 법률에 근거한 제한 역시 본질적인 부분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 집회 및 시위를 하려면 경찰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집회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처음 가본 사람들은 그 과정이 허가 절차로 느껴지기도 한다. 미신고 집회조차 경찰이 마음대로 해산명령이나 방해를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헌법의 취지이다.
그러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란 것이 제정되면서 오히려 경찰은 자기 임의대로 집회를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국민들 역시 그런 경찰의 태도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우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된다. 경기 침체나 보수정권의 장기 집권 등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공권력이나 법률 등으로 대표되는 ‘권위에 의한 지배’가 더 안정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것만은 현상적 사실이다.
3. 집회 및 시위는 언론에서 다뤄지는 것이 목표다?
이 글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매우 인상적이다.
저도 시위를 많이 참여했지만 현실적으로 시위로 직접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하는 것은 OO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진 몇 장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정세를 뒤집으면서 정부와 정치인을 압박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정치인들을 통해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위정자들이 시민들의 분노를 들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꼭 청와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언론을 통해서 분노는 잘 느끼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위정자들이 시위대를 무서워할거 같습니까? 아닙니다. 시위대를 무서워 하는게 아니라 시위대가 바꿔놓은 정세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인들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백날 청와대 앞에서 시위대의 목소리가 들리게 시위를 해도 위정자들은 눈 깜짝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지도 않고요. 시위대가 청와대로 물리적으로 진입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시위대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시위대의 목소리가 청와대에 들리냐 안들리냐’가 아닙니다. 계속 시위가 언론에 주목을 받도록 해야 하고 언론에서 폭력시위라는 프레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광화문 앞에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후략)
민중총궐기 준비를 하면서 SNS에서 이런 의견을 많이 듣고 있다. 집단적 여론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집회를 개최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청와대 앞에 갈 필요가 있냐고 하시는 분들이다. 집회 및 시위가 언론과 SNS로 퍼져나가면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대의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면 되는 것 아닌가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대의정치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회나 시위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묻고 싶다.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는 집회나 시위는 어떻게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왜 집회 및 시위가 언론 보도의 하위 개념이어야 하는가? 이런 걸 보면, 언론의 자유는 지식인들의 것이며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노동자와 민중의 것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현재 한국 사회의 대의정치는 일부 정치 엘리트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고, 그 곳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소외된 사람들은 대의정치를 거부하고 직접정치의 한 갈래인 ‘집회 및 시위’의형태로 나서고 있다고 본다.
물론 대의정치를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번 11월 12일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야3당도 거리로 나오는 판이니, 결국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압박하기 위한 집회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타격대상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까운 곳에 가서 구호를 외치든 함성을 지르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지금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열망이다
필자가 언급한대로 ‘1987년 6월 항쟁이 반쪽의 승리로 평가절하’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비교대상이 4.19혁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폭력 평화적 노선의 한계라기보다는 항쟁 지도부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4.19혁명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진격하는 국민들을 경찰들이 총으로 쏜 것에 비하면 혁명 군중은 대단히 평화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승만을 끌어내렸다. 5.16군사쿠데타로 좌절되긴 했지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들도 있었다.
그에 반해서 6월 항쟁 지도부는 전두환, 노태우를 살려두고도 개헌만으로 새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야당과 적당히 타협했고 분열하여 노태우가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상황을 자처했다.
11월 12일 ‘박근혜 퇴진’을 주장하면서 거리로 나온 지금의 보수야당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정말로 박근혜 정권의 퇴진과 이명박 정권부터 보수세력이 구축한 지금의 체제가 붕괴되길 원할까. 그러면 애초에 ‘거국내각’이란 말을 꺼내질 말았어야 했다. 그들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길 원한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새로운 한국 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잡으면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최근 집회에서 나오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박근혜 정권의 퇴진’ 그 이상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현재 국가시스템의 내부자들에 대한 저항과 거부이고 새로운 한국 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이다. 그 방향이 딱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많은 자유를 위한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얘기하는 것처럼 지금은 혁명정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시민혁명의 정세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래서 현재의 정치권력만을 교체하면 된다거나 대통령제가 문제니 내각제로 바꾸면 된다거나 하는 주장은 핵심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 지식인들은 거리의 목소리를 좀 더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언론을 통해서 나오는 이야기 말고 진짜 현장의 목소리 말이다. 이번에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거대한 물결에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원문 : 박정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