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은 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비롯되어 4.13 호헌, 이한열 군 사망을 거치며 장장 6개월간 이어졌던 장기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다치고 전국 도시는 연일 최루탄의 연기에 파묻여야 했던 전쟁과도 같은 투쟁이었지만, 이 투쟁의 기조는 뜻밖에도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다. 비록 반쪽의 승리로 평가절하될지언정 직선제개헌이라는 성과를 끌어낸 것 역시 비폭력 노선이었다.
당시 투쟁의 주력이었던 학생운동의 지도부 서대협은 이러한 비폭력노선을 분명히 하여 시위 형태가 투석전보다는 연좌농성과 평화행진이 주를 이루었다. 때로는 그 많은 인원이 일제히 길에 드러눕기도 해서 이후 몇 년 간 학생운동의 유행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포연 자욱한 모습은 시위대의 폭력을 유도하는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정세에 있을 때 굳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대중의 참여를 제약하여 관객으로 만들 뿐이다. 무절제한 폭력은 독재정권에게 역선전의 빌미를 주고, 따라서 대중들의 지지를 약화시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낮은 수준이라도 대중이 쉽게 동참할 수 있는 평화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 <87년 6월 항쟁,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다> 유기홍
6월 항쟁의 첫 번째 변곡점, 시민의 참여
항쟁의 초기였던 2월 7일, 3월 3일 두 번의 박종철 추모집회 때 경찰은 시민과 학생들을 말 그대로 ‘쥐 잡듯이’ 잡았다. 최루탄도 필요 없이 경찰 간부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에 서서 핸드마이크로 “저기 저 마스크 낀 새끼 잡아!” 하면 전경들은 득달같이 달려가 학생들을 잡아채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이 그때의 풍경이었다.
이렇게 기세등등하던 경찰이 약세로 돌아선 것은 명동성당 농성으로 투쟁의 무대가 명동으로 옮겨가면서부터였다. 명동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모두 ‘구경 삼아’ 명동성당 앞을 찾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응원했다. 학생들이었다면 마치 전쟁터의 적군 대하듯 때려잡았을 경찰도 시민들의 등장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이 정부의 안전귀가를 보장받고 성당을 떠날 때 명동 전역이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이전에도 6월 항쟁은 ‘넥타이부대의 반란’으로 불릴 만큼 시민의 참여가 많았지만, 시민들이 방관자, 혹은 소극적인 후원자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투쟁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두 번째 변곡점, 비폭력 운동
서대협은 처음부터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표방했다. 그러나 서대협이 지도부를 전적으로 장악한 것은 아니어서 대중의 참여보다는 투쟁의 상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강경파들은 무차별 폭력으로 나섰고, 경찰의 과잉진압과 어울려 시위는 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런 양상에서 비폭력 기조로 완전히 자리를 잡게 한 것은 바로 이한열 군의 사망이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비폭력노선을 공식화하고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갖게 된다. 이때 수녀님들과 여학생들이 최루탄 발사기에 꽃을 꽂고 충돌 뒤에도 전경들의 땀을 닦아주는 등의 퍼포먼스가 처음 등장했다. 경찰의 진압은 여전히 극악무도했지만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시민들이 주변을 에워싸며 ‘비폭력’을 외쳤다.
6월 26일의 집회는 ‘평화 대행진’으로 이름붙여졌다. 이미 약세로 돌아서 있던 정권은 87년 투쟁에서 가장 대규모의 군중이 모였던 이 날 시위에는 함부로 도발하지 못했다. 이것이 결국 6.29 선언으로 마무리됐다.
민주노총의 청와대 집회 신고
민주노총이 12일 대회에 청와대 앞까지 진출하겠다고 집회 신고를 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폭력 유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로서는 백남기 농민을 사망케 한 정권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시민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민주노총의 존재를 지극히 존경하고 늘 죄스러운 마음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습관적 투쟁성향에는 동조할 수 없다. 87년의 교훈은 승리의 힘이 전위대의 투쟁성이 아닌 시민의 참여에서 나온다는 것이며 비폭력 평화투쟁이 승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만약 민주노총이 이런 노선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민들 스스로 그들을 격리해낼 수밖에 없다. 나는 12일 집회에 참여할 예정이지만 낮에 갔다가 민주노총의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원문 : 고일석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