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14일 만에 400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며 흥행하고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는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14번째 영화이자 지금까지 마블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 즉 마블 유니버스가 아닌 마블 멀티버스를 제시하는 첫 영화다.
스토리는 새롭지 않다. 거만한 외과 의사 스티븐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교통사고 후 네팔에서 정신적 수련을 거치며 진짜 세상이 따로 있음을 깨닫고 전사로 거듭난다. <스타워즈> <매트릭스> <배트맨 비긴즈> 등 너무나도 익숙한 영웅 서사 플롯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이 플롯으로 지어진 영웅담이 많다. 닥터 스트레인지 캐릭터의 변화 과정도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만큼 단조롭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강점은 뻔한 이야기를 새롭게 보이도록 구현한 놀랍도록 정교한 비주얼에 있다. 현대과학에 정통한 의사가 어느 날 초자연적 현상을 믿게 되면서 두 세계를 오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마법인데 주인공은 여전히 현실 세계에 속해 있다. 영화는 마법과 현실의 불일치를 절묘하게 영상으로 접합해낸다.
스트레인지는 영적 세계와 병원을 오가면서 과학과 비과학 모두에 의존해 영웅담을 펼쳐보인다. 미러 디멘션, 다크 디멘션 등의 신세계가 ‘매트릭스’처럼 구축돼 철학적 함의도 내포한다.
스트레인지의 멘토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의 모습도 신선하다. 그는 남녀와 동서양의 경계가 흐릿한 외모로 유사한 영화들이 쌓아온 동양적인 선입견을 탈피한다. 예비 마법사들이 수련하는 카트만두의 카마르 타지는 때론 소림사처럼, 때론 호그와트 마법학교처럼도 보인다.
인도의 베다 사상을 서양에 접목한 국적 불명의 세계에서 수련으로 기를 터득한 마법사들은 자유자재로 공간을 뒤틀고 시간의 방향을 바꾼다. 공간이 기하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은 영화 <인셉션>을 닮았고 시간을 되돌려 싸우는 장면은 영화 <슈퍼맨>과 <엣지 오브 투머로우>를 떠오르게 하는데 <닥터 스트레인지>는 거기서 몇 단계 더 진화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액션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닥터 스트레인지>는 익숙한 이야기를 최대한 새롭게 보이도록 시각적인 측면을 업그레이드한 영화다.
마블 멀티버스 새 시대를 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외에 또 다른 무한대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멀티버스’는 1957년 물리학자 휴 에버렛 3세가 창안한 다중세계에 과학적 근거를 두고 있는 개념이다. 양자역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뒤 인간의 관찰 한계를 뛰어넘는 우주 너머에 대한 상상력은 평행우주 등 다중우주의 가능성으로 뻗어갔다. 2003년 과학 저술가 폴 데이비스는 멀티버스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가설을 제시하며 논의를 확장하기도 했다.
1960년대 스탠 리와 스티브 디코가 창안한 마블의 멀티버스는 초기 다중우주 개념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했다. 여러 우주들에 위계질서를 부여하고, 슈퍼히어로들의 활약에 따라 유니버스 각각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설정이 차별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어벤져스 히어로들과 스파이더맨은 전부 다른 유니버스에서 펼쳐진 사건들이고 마블은 이제 이 다중우주의 히어로들을 관리할 리더로 닥터 스트레인지를 제시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복잡한데 이런 우주가 동시에 무한히 존재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더구나 마블은 코믹스의 세계를 꿰고 있는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즉각적으로 이해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 마블은 시각효과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천체물리학자 아담 프랭크가 자문을 맡아 마법사들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을 마치 인간의 뇌신경처럼 보이게 구성했다.
꿈을 소재로 한 ‘인셉션’이 꿈속을 들여다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닥터 스트레인지’ 역시 뇌 속을 탐험하는 듯한 사이키델릭한 이미지가 스크린을 휘감는다. 삼각형과 사각형, 그리고 원 이미지를 반복 활용해 접히고 쪼개지는 영상에 집중하다 보면 미술에 수학을 접목한 화가 에셔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한다.
스토리의 헐거움과 시각적 쾌감. 둘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할까? 애초 영화라는 매체의 탄생 이유가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줘 놀라게 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 영화다. 압도적 스펙터클이 스토리의 헐거움을 상쇄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화 시도 30년 만의 결실
1963년 발간된 만화 <닥터 스트레인지>의 영화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무려 30년 전부터 수많은 창작자들이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던 아이템이다. <백 투더 퓨쳐> 각본을 쓴 밥 게일이 1986년 시도한 이래 <스크림>의 감독 웨스 크레이븐, <다크 나이트>의 각본을 쓴 데이비드 S. 고이어, <클리프행어> 시나리오를 쓴 마이클 프랜스 등 면면도 화려하다. <시드와 낸시>의 감독 알렉스 콕스는 1989년 원작자인 스탠 리와 함께 각본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결실을 맺지 못하고 무산됐다.
1997년엔 TV 시리즈 <소프라노스> 제작자 버니 브릴스타인과 브래드 그레이가 영화로 눈을 돌려 준비했지만 결국 복잡한 멀티버스 세계관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을 뗐다. 2004년 마블 스튜디오의 아비 아라드 CEO가 끝내 “이건 정말 완성되기 힘든 영화”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마블이 영화제작사로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영화화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다. 마블의 새 수장 케빈 파이기는 2013년 새로운 라인업인 <페이즈 3(Phase 3)>를 발표하며 ‘닥터 스트레인지’를 가장 중요한 영화로 언급했다.
자레드 레토, 에단 호크, 오스카 아이작, 이완 맥그리거, 매슈 매코너헤이, 제이크 질렌할, 콜린 파렐, 키아누 리브스, 라이언 고슬링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캐스팅 물망에 오르내리며 기대감이 치솟았고 결국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마블의 멀티버스를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로 낙점됐다. 컴버배치는 자신의 출세작이자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셜록>의 오만한 천재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살려 빠르게 능력을 습득하는 슈퍼히어로로 거듭난다.
지금까지 13편의 영화로 프랜차이즈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마블 스튜디오는 그동안 마니아층에선 내리사랑을 받아왔지만 일반 대중에겐 영화가 점점 비슷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새 분기점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마블은 시각적 신선함으로 모험을 시도했다. 익숙함을 최대한 감추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 비즈니스 전략으로도 뜯어볼 만하다. 마블의 질주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원문 : 유창의 무비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