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비정규직 일자리’는 ‘대안’이다
입법보좌진 강의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한국 정치의 문제점 중 하나로 ‘반대, 문제 제기 중심’의 접근은 많지만 ‘대안, 문제 해결 중심’의 접근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 해결 중심의 접근은 문제 제기 및 폭로 중심의 접근을 충분히 하고 그것에 ‘약간 덧붙이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 양자는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접근방법 자체를 달리하게 된다. 둘은 이질적이다.
연합뉴스는 언론사에 기사를 공급하는 도매 매체이다. 특히 기삿거리가 적은 주말에 연합뉴스는 정부자료에 근거한 데이터 기사를 내보낸다. 그러면 다른 언론사들이 약간 변형해서 받아쓰게 된다.
지난 11월 6일에 발표된 연합뉴스 기사는 ‘아주 흔한’ 데이터 뉴스이다. 8월 기준 통계청 발표자료에 근거해서 60세 이상 ‘비정규직이 2배로’ 늘어났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극심한 노인빈곤율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매체에서 연합뉴스의 팩트와 함께 기조를 받아썼다. 즉 ‘노인 비정규직 증가’가 ‘노인 빈곤’의 원인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중심의 노인 일자리 확대는 문제가 있다는 논조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노인 비정규직 일자리 증가’는 노인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대안’이다. 즉 언론의 무지함에 기반을 둔 기사이다. 자칫 언론의 무지로 인해 오히려 노인 빈곤율을 조장하게 될까 봐 걱정이다.
노인 비정규직 일자리가 증가한 것이 노인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대안’이라는 주장은 ‘비정규직=사라져야 할 것=모든 나쁜 것의 원조인 도깨비방망이 같은 것’으로 생각하던 전통 진보, 운동권, 야당 성향 지지자들이 보기에는 생뚱맞게 들릴 수 있다.
- ‘고소득, 정규직 일자리’와 비교하면
- ‘저소득, 비정규직 일자리’는 분명 ‘덜 좋은’ 대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 ‘빈곤에 의한 자살’보다는 ‘더 좋은’ 대안이다.
요컨대, 실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어르신들의, 저소득, 비정규직 일자리’는 고소득 정규직 일자리의 대체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에 의한 자살에 대한 ‘자생적 대안’의 일환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게 팩트이며, 이게 노인 빈곤 문제에 대해서도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 하에서 봐야만 하는 이유이다.
누구의 눈으로 ‘노인 빈곤’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가
사회과학에서 누구의 눈으로 사건과 현상을 바라보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성희롱과 성폭력 문제는 남성의 눈으로 보는 것과 여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 문제설정, 원인, 책임, 해법에 이르기까지 달라진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눈으로 보면서 가급적이면 ‘소외된, 배제된, 약자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인 빈곤과 노인 노동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한국 조직노동 운동의 조직적 실체는 ‘대기업+공공부문+50대+남성+정규직’이다. 연봉 6천만 원 이상의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의 눈으로 노인 빈곤 문제를 보면 안 된다. 노인의 눈으로, 특히 빈곤 노인의 눈으로 노인 빈곤문제를 봐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제대로 이해되고, 전체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실현 가능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실제 노인의 입장에서 선택 가능한 경우의 수는 다음의 4가지 이외에는 없다.
- 가족복지. 자식들이 돌보는 경우이다. 이건, ‘중산층에 준하는’ 자녀들만 가능하다.
- 사회복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처럼 공적인 노후소득보장제도의 소득대체율이 핵심이다. 엄청난 재원이 요구된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와 한국의 진보파들이 사실상 ‘저부담-고복지’를 주장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단기간에 소득대체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일자리(복지). 정규직이 되었건 비정규직이 되었건, 죽지 않기 위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도록 일을 하는 것이다. (60세 이상, 혹은 65세 이상이 되어서도)
- 빈곤에 의한 자살.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다. 가족복지, 사회복지, 일자리(복지) 모두에 대한 접근권이 차단되었을 때, 결국 이 방법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실제로 각종 자료들을 주의 깊게 재구성해볼 때, (자살의 위협을 받고 있는) 빈곤 노인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노인 1인 가구 + 일자리 없는 경우’이다. 자녀의 돌봄을 받거나, 비록 비정규직 일자리일지언정 일자리를 마련해주면 이분들은 빈곤을 탈출할 수 있고, 자살하지 않을 수 있다.
‘어르신, 비정규직 일자리’를 비판하는 것은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어르신 문제, 노인빈곤 문제, 노인의 노동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한국 진보 운동권들이 시선이며, 이들이 주도해서 만들어내는 담론이다.
자신들은 연봉 6천만 원 이상을 받고 있는 상위 10%의 노동자들이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아름다운 이야기만 해도 자신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노인 빈곤, 노인 노동 문제에서는 정책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① 빈곤에 의해 자살하는 어르신들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정책목표의 ‘상위가치’ 인지, ② 아니면 대기업-공공부문 노조와 진보운동권들이 만들어내는 허구적인 프레임인 (빈곤에 의한 자살 노인이 늘어나더라도) ‘비정규직 줄이기’ 그 자체가 정책목표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이 빈곤노인을 줄이고 자살하는 노인을 줄이는 것이 최우선적 정책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빈곤 노인에 대한 우리의 대안적 정책의 방향성은 분명해진다.
①가족 복지 ②사회 복지 ③일자리 복지 ④빈곤에 의한 자살이라는 어르신들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4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④빈곤에 의한 자살을 막기 위해서 ③(어르신들의 비정규직 일자리 확대를 포함하여) 일자리 복지를 늘리고 ②사회복지를 사회적 합의’ 수준만큼 점진적으로 확대하며 ①가족복지를 촉진하는 법과 제도를 지원해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위에서 언급한 ②번에 해당하는 기초연금 정책과 ③번에 해당하는 ‘노인 일자리 정책’의 확대로 인해서 노인빈곤율은 감소했다.
빈곤에 의한 노인 자살을 막고자 한다면, 한 축으로는 ‘어르신 비정규직 일자리’를 지금보다 더 확대해야 하며, 다른 한 축으로는 ‘노후소득 보장, 공적연금 제도’의 소득 대체율을 높여야 한다. 두 가지 정책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둘 중 하나만 옳은 것이 아니다.
원문 :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