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 사회는 눈을 감는가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에서 무더기 사표를 받더니 총리 인선도 전격발표한다. 이 발표는 비단 야당들이 몰랐던 것일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도 몰랐던 것이라고 한다. 진실규명 따위에 협조하는 태도는 전혀 없다. 지금 박근혜 정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최순실을 모를 뿐 아니라 대통령도 독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황은 점차로 극단적이 되어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일당들이 완전무죄를 주장하면서 독단을 계속한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는 거의 있을 수 없어 보이지만, 그들은 이 모든 불리한 정황들을 다 뒤집어엎고 ‘사실은 그게 다 오해였다. 나는 무죄다’로 결론 나는 상황으로 가거나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라고 외치던 이명박을 생각해 보라) 국가와 국민들을 희롱한 죄로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력의 기반이 되어온 낡은 인식체계까지 한꺼번에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 정치에 보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현 여당은 이념에 의해 뭉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미국의 공화당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집단을 한 줄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결국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보수나 현 여당 세력의 정수는 박정희 신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나 계속되어온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위기 속에서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를 가리켜 유시민은 한때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의 지지율은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광신도들은 단순한 하나의 사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정희는 위대하며 따라서 그 박정희의 후계자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이것은 왕에게 복종하는 봉건사회의 정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상당 인구는 이런 봉건적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현 여당은 그걸 이용해서 이제까지 집권해 왔다.
그걸 생각했을 때 오늘날의 최순실-박근혜 사태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박근혜의 몰락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정희의 신화까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고작 사교집단에게 딸을 맡겨서 이 모양으로 만들 정도의 인물밖에는 되지 못했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혈연을 강조하는 한국에서 부모를 보면 자식을 알고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안다는 정서는 특히 여당을 지지해온 노년층에게 강하다.
따라서 박근혜가 그 정신세계가 치명적으로 고장 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질 수록 박정희 신화도 망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박정희 신화가 망가진다면 지금 여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구심력은 심각히 망가질 것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박지만이나 박근령 같은 다른 자식을 동원하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 같은 다른 권위를 내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지금의 박정희 신화만큼 노년층을 강력히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박정희는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박근혜가 만약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자신의 실수를 조기에 인정한다면 동정표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런 동정론이 있다. 그만큼 박정희의 신화는 뿌리 깊다. 사실 비슷한 짓을 박근혜 이외의 다른 인물들이 했다면 지금 광화문에서는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 불을 지르고서 맥없이 앉아있다
그러나 박근혜는 지독히 고립되어 있고 너무나 오랫동안 왜곡된 세계를 살았기 때문에 현실 인식이 부족하고 타협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현 상황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녀 자신과 최순실 일가가 모두 비교적 무사히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갑작스레 혼자서 깜짝 총리발표를 하는 이유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녀의 현실 인식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상황은 극단적이 되어간다. 실제로 야권에서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대통령 하야 이야기를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모습에 이재명, 박원순, 안철수 등 정치인들도 하야 주장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상황은 점차로 극단적이 되어가고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는 계속 분노의 땔감을 던져넣기 때문이다.
시민들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합리적인 판단을 못 내린다는 것을 과거의 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느끼게 되고 있다. 따라서 강경파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대통령이 고립과 불통의 정치를 계속한다면(그녀는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소통도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통의 능력이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상황은 점점 극단적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녀뿐만 아니라 새누리당도 확실히 붕괴하게 된다. 버티는 대통령과 당 대표자가 새누리당의 비박계 의원들로서는 정말 미울 것이다.
사실 그녀를 모셨던 장관이며 청와대 수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박근혜는 유령 같았다. 일부 거짓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도 그녀를 만나서 독대를 하는 인간이 거의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통령은 소통하고 토론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뻔한 의전용 대화만 오고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1년 가까이 청와대에서 모셨던 정무수석이나 경제부총리도 대통령을 따로 만날 수 없었으며 대면보고도 거의 없었다고 하니 이 나라는 그야말로 아무 중심이 없이 굴러가고 있었던 셈이다.
그녀는 누구도 신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가까운 사람들은 지금 수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현실 인식이 없는 공주는 지금 자신의 나라에 불을 지르고서 맥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그녀밖에는 끌 수 없는 불인데 말이다.
지금 박근혜가 이긴다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따라서 미래는 극단적으로 굴러갈 가능성이 크다. 이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시도들이 더 큰 국민적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이렇게 심각해질 싸움에서 박근혜가 이긴다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아마 조선 말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지금도 사법부며 경찰에서 공무원 사회, 전문가 집단에 대해 국민들 서로 서로의 불신이 아주 크다. 박근혜가 이긴다면 이 사회의 기본을 지키는 신뢰가 결정적으로 망가질 것이며, 그쯤 되면 이 나라는 망했다고 봐야 한다. 국가는 토지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법을 지키며 누가 열심히 공부하고 줄 서서 양보하면 자기 차례가 돌아온다고 믿을 것인가. 최순실이 하려던 것처럼 사기라도 쳐서 돈 들고 외국으로 도망갈 궁리만 할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말한 대로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렇게 된다면 한국은 비로소 미래로 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봉건사회의 완전한 매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는 것은 재벌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재벌들도 적당히 박근혜를 제거하려고 할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분노는 너무나 커서 재벌개혁까지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세습식 재벌 봉건 구조는 박근혜의 권력기반인 봉건 정서에 기댄 것이다.
아직은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정말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판 위에 모든 것을 다 올려놓고 한국이 미래로 나가는 현대국가로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할 것인지, 법이나 최소한의 양심도 다 상관없는 전근대 봉건국가로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할 것인지의 전쟁이다.
그렇게까지 되면 중립은 없다. 그리고 한국은 변할 것이다. 미국의 오늘날은 남북전쟁이 만든 바가 크다. 미래의 한국은 바로 이 전쟁으로 한판에 결정될 것이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필리핀이나 내전 국가일 것이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