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국 내각, 황당한 제안
많은 사람들이 거국내각 얘기를 하지만, 나는 처음에 문재인과 조선일보의 거국내각 제안을 들었을 때 황당했다. 대통령제 하에서 거국내각 주장은 정치적 공세를 피기 위해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거국내각이 필요한 상황에 몰렸을 때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1년 4개월이나 집권 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거국내각은 정치 공세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 궐위시 총리가 대행하는 게 우리 헌법인데, 대통령이 멀쩡히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슨 놈의 거국 내각인가. 거국내각은 대통령 물러가라는 소리를 못할 때 정치 공세로 말하는 거지, 실제로 대통령이 물러가야 할 상황에서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선거가 임박했을 때 선거 관리를 위한 중립 내각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식물 대통령으로 1년 4개월을 지낸다는 게 가능한가? 설사 가능할지라도 적절한가?
하야나 탄핵을 헌정중단 사태라고 그러는데, 이것도 이해할 수 없다. 하야와 탄핵 모두 헌법에 정해진 절차를 그대로 따르는데 어떻게 이 행위가 헌정 중단인가? 하야나 탄핵은 쿠데타가 아니다. 하야하면 60일 이내에 선거를 해야 한다고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하야 후 60일 내 선거가 헌법에 따르는 행위다.
내가 이 사태의 가장 적절한 해결 방안이 하야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현재의 사태는 한국 사회의 근간이 되는 제도적 체계(institutional scaffolding)가 무너지는 상황이다.
사회학에서 ‘제도’란 법률과 관습을 포함하여 한 사회의 행동의 준거를 마련해주는 규범의 일체를 지칭한다. 한 사회에 가장 이식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제도다. 제도라는 게 법률로 정한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대중이 그 제도의 정당성을 믿고 그에 맞춰 행동해야 그 제도가 실제로 기능한다. 지나친 단순화를 무릅쓴다면 법률적 제도와 그 제도를 믿는 대중의 신뢰가 더해져야 한 사회에서 비로써 제도가 성립한다.
미국의 부시 정부에서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여 민주주의 ‘제도’를 아랍 사회에 이식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법률을 만들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정당성이 선거를 통해 성립한다는 다수 대중의 합의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의무교육을 제도화해도 다수 대중이 자발적으로 노동력으로써의 아동을 포기하고 아동을 자기 돈을 들여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교육 제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어떻게 제도가 한 사회에 안착하는지는 사회과학에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국민들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국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정부를 꾸리는 제도는 좋든 싫든 이승만부터 시작해서 근 70년 동안 한국에서 시행한 제도다. 정부조직, 언론과 각종 연구소 등 정부와 관련이 있는 모든 조직이 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직접 선거에 의해 최다 득표로 당선된 대통령은 그 개인이 국가를 대표하는 헌법 기관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헌법 기관으로써의 대통령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제도적 전통이 법률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다.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에 대한 대중의 믿음은 한편으로 행정관료를 고시 제도를 통해 선발하여 행정부의 기본 기능이 부패가 아닌 엘리트의 능력에 의해 돌아가게 만들었던 우리나라의 훌륭한 전통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대통령과 그 주변의 부패가 일상화되었어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행정 기능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대중의 믿음이 있다. 삼권 분립이 헌법이기는 하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정부 체계가 행정부의 권위에 기반한 체계임에 동의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이러한 역사를 반추할 때 정치권 일부에서 주장하는 내각제 도입 시도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훨씬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행정부 수반을 직접 뽑고, 그 사람(=대통령)에게 국가를 이끌 권위를 부여하는 다수 대중의 의지가 그렇게 쉽게 바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제는 70년에 이르는 제도적 전통에 기반한 제도다. 87년의 ‘호헌철폐 직선제 실시’까지 더해져 피의 역사까지 포함한 제도가 현재의 대통령 직선제다. 내각제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한 사회에서 제도가 어떻게 뿌리내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대통령에게 부여했던 다수 대중의 한국의 행정 권력에 대한 신뢰, 한국 국가 운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중적 신뢰의 축이 무너지는 사태다. 국가로서의 제도적 체계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한 국가에서 이 신뢰가 무너지면 이를 다시 회복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 경향, “대통령의 책임이 본질이다”
- 한겨레, “대통령 책임 규명하는 게 핵심”
- 중앙일보 사설, “대통령에 수사 자청 건의하라”
- 조선일보 사설, “대통령은 수사 대상”
최순실 수사 결과 박 대통령이 죄가 없으면 사람들이 믿겠는가? 만약 죄가 있는 것으로 나오면, 대통령 역할 수행이 가능한가? 법률적으로는 헌정 중단이 아니지만, 실제적 의미의 헌정중단 사태다.
거국내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당의 꼭두각시였던 대통령이 앞으로 1년 4개월 동안 행정부의 수장, 외교와 안보를 책임지는 국가의 수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는 거국내각의 수장이 국가를 이끄는 것을 대중이 쉽게 용납하고 권위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민주당에서 말하듯이 국회가 거국내각의 총리를 임명한다는 것은 행정권력을 부여받지 못한 국회가 행정부의 수반을 임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대중이 받아들일 것으로 믿나? 그게 우리나라의 헌법 정신에 맞는가? 국민의 선거가 아닌 정치 엘리트 일부가 합의하는 사람이 행정부의 수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나?
내가 보기에는 민주당과 조선일보가 제안하는 거국내각이 오히려 대통령제를 택한 우리나라 헌법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만용이다.
대통령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하야 후 차기 선거 때까지 (선출되지 못한 권력인) 국무총리가 임시로 업무를 대행하며 60일간의 혼돈을 겪는 것. 이게 한국의 헌법 아닌가?
하루라도 빨리 권위를 상실한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새로운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국가의 제도적 체계가 무너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지?
PS 1.
거국 내각의 실제 기능은 현 사태에서 국가 기능을 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뒤흔들어 향후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을 쉽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일종의 국가 정치 체계에 대한 아노미 상태를 유발하는 장치.
PS 2.
하야도 거국내각도 아니면 일부 개각하면서 그냥 뭉개는 옵션이 남는다. 이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만, 그러면 한국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위험 상태에 빠질 것이다.
원문 : SOVI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