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의 한가운데에는 사실 종교가 있었다.
박근혜 최태민 구국기도회
기독교에서는 최태민은 정식 목사가 아니라고 선을 긋지만,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이 무속인들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차세대 대권 주자인 반기문 총장도 신천지 총수의 부인과 사진을 찍은 모습과 기사도 바이럴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한분이었겠지만, 이런 사진이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서로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전 정권인 MB 역시 소망교회의 커넥션이 문제가 되었다.
어쩌다 한국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신정합일의 후진 정치도 우려스럽지만, 기독교인으로 더 안타까운 건 여기에 ‘교회’와 ‘목사’의 타이틀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난 어쩌면 그렇게 신앙 좋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한국 기독교도 이번 사태의 책임은 피해갈 수 없으며, 큰 숙제가 남겨졌다고 본다. 한국 교회에 바라는 내 생각은 크게 아래와 같다.
1. 신앙과 정치, 이권과의 분리
최순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네트워크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커뮤니티로 쓰는 경우가 제법 많다. 사실 박근혜뿐만 아니라 이전 정권인 MB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기독교인,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기독교인끼리 무장을 해제하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신은 신앙 외의 문제로도 번진다. 김영란법에 종교인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종교를 통한 ‘끼리끼리’ 정신은 결국 타인들에게 차별로 작용하게 되어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코이노니아도 신앙에 근거한 관계이지, 이걸 기반으로 다른 이권과 정을 주고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걸 시작하는 순간 교회는 똥파리들을 불러 모으고, 중요한 것이 뒤바뀌어 버린다.
어쩌면 교회가 이권과 관계가 없었다면 신천지도, 최순실도 없었을지 모른다. 종교란 거대한 시스템이 정치인들 입맛에는 너무 좋았던 것 자체가 문제다.
마찬가지로 목사님들의 정치적 발언은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는 공산주의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으며, 오직 약자에 대한 보살핌만 나온다. 조금 양보해서, 교회의 오랜 활동이 상대방의 인성을 검증하는 도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예배 참석하는 정도로 검증할 수 있거나 외부 네트워크에서 배타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크리스천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목적의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2. 비판적 사고에 대한 수용, 과학과의 분리
두 번째는 비판에 대한 허용이다. 교회는 이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서로 이단이 아니라고 증명하기에 바쁘다. 누가 더 근본주의에 가까우냐 경쟁하는 분위기인데 결국 이는 문자주의에 빠지는 지름길이고, 배타주의를 강하게 한다.
과학이 증명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에서 믿는 완벽한 자연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이 오차투성이어서 보정을 해야 하며,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오차투성이다. 지구와 달의 공전, 자전 속도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으며, 거리와 별자리도 달라졌다. 2,000년 사이에도 말이다. 목사님들의 설교에서는 종종 이런 부분들이 무시된다. 심지어는 그 문자 때문에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이르러, 과학을 부정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예전 포스팅에서 난 창조과학회를 강하게 비방했지만, 학생들이 기구에 카메라 달아 우주를 찍는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
무엇보다도 신앙이 이렇게 무비판적이게 되면, 교회는 정화능력을 잃는다. 신천지나 영생교 같은 이단들이 교계에 판을 치고 범죄 목회자들이 돌아다녀도 ‘우리 교회는 아니겠지’ ‘우리 교단이나 우리 목사님은 그럴 리 없어’ 라는 무비판적인 의식을 갖추게 되고, ‘의심은 믿음에 백해무익’하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이단에 대한 면역력을 약화시킨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밖에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식은 마치 ‘별세계’를 바라보는 것 같다. 목사들조차 썩어빠진 기독세력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기독교 전체에 대한 정화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하지만, 비판을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조직과 생각을 건강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이다. 성경은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66권의 정보가 너무 적다. 결국 더 나은 결론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의 진정한 뜻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비판을 수용해야 하며, 협력해야 한다. 비판적 사고의 기본체계인 과학을 배척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번 사건이 한국의 종교-정치 시스템에 경종을 울렸으면 좋겠다.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 사실과 상식들이 전파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것들은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정치세력들은 알맞게 이를 이용했다. 기독교를 믿는 1인으로서, 기독교가 조금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한국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추가적으로 신학생 시국연석회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종교단체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조금 위안이 된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원문 : 숲속얘기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