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6년 7월 21일 오후 7시, 마포 정치발전소에서 있었던 ‘제5회 내만복 포럼’ 강남훈 교수(한신대) 발제 ‘기본소득의 특징과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토론문입니다. 기본소득의 의의와 한계에 대한 빼어난 논문입니다.
기본소득의 특징과 정치적 가능성을 묻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기본소득’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다양한 제도가 섞여 있다는 점에 있다. 부의 소득세에 가까운 시장 자유주의 버전의 기본소득으로부터, 일반적인 의미의 ‘보편적 복지’가 포괄하는 아동수당이나 노인수당을 ‘부분 기본소득’으로 칭하는 것,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정액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도적 형태가 기본소득으로 불린다.
마지막에 언급한 기본소득조차 기존의 복지들을 어느 정도 대체하는지에 따라 그 재정적 부담과 재분배 효과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에 앞서 그 개념정의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이번 논의에서는 발제자를 통해 이야기되고자 하는 ‘기본소득’의 개념이 기존의 복지와의 대체를 최소화하면서,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정액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의미가 명확해진바, 본 토론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논의를 하고자 한다. 우선은 발제문에 나온 논의 중에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 싶은 내용들을 몇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고, 마지막에 제가 생각하는 기본소득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으로 하겠다.
선별복지 vs. 기본소득: 적절한 비교의 대상인가?
발제자는 기본소득의 재분배 효과, 재원조달을 위한 정치적 동맹과 중산층의 지위, 행정비용 절감 및 낙인 감소 효과에 관한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선별복지와 기본소득을 대비하여 논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선별복지’는 대체로 공공부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볼 때 기본소득이 자원을 할당하는 방식은 공공부조의 ‘자산조사를 통한 욕구’에 따른 것 외에도 기존의 모든 할당원리와 다르다. 기존의 복지제도에서 급여를 할당하는 원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략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장애인에 대한 급여나 요양에 대한 급여는 ‘진단적 구분’에 기초한다.
- 사회보험은 ‘기여에 대한 보상’에 기초한다.
- 아동수당이나 노인수당은 같은 것은 ‘귀속적 욕구’에 기초하여 지급된다.
- 공공부조는 앞에 이야기한 대로 ‘자산조사를 통한 욕구’에 따라 지급된다.
즉, 상당히 보편적인 제도로 여겨지는 사회보험이나 아동수당과 같은 제도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수급자의 ‘필요’를 고려하는 것이다. 2012년 전후에 벌어졌던 ‘보편복지 대 선별복지’ 논란에서 ‘보편복지’의 상징이 되었던 ‘무상급식’조차 ‘급식을 필요로 하는 학령기 아동인 있는 가정’이라는 필요를 고려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이와 같은 ‘최소한의 필요’에 대한 가정까지도 배제한 완전한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좀 단순화하여 이야기한다면 보편주의적 할당원리와 선별주의적 할당원리를 일직선 위에 연속선으로 표시할 때, 한쪽 극단에 공공부조와 같은 잔여적 급여가 있고 다른 쪽 극단에 기본소득이 있으며,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사회수당과 같은 다른 제도들이 이 두 가지의 사이에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할당의 원리 측면에서 기존 제도와 비교하고자 한다면, 선별적 제도와의 비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선별주의적 제도에 대해 기본소득이 가지는 거의 대부분의 우위는 다른 형태의 보편적 복지에도 해당되며, 선별적 제도에 대한 우위만으로 기본소득이 다른 형태의 보편적 복지에 대해 동일한 우위를 가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요컨대 기본소득의 다른 형태의 할당원리에 대한 우위는 당연히 선별적 복지에 대해서 가장 손쉽게 논증할 수 있겠지만, 사회보험에 대한, 보편적 서비스에 대한, 귀속적 지위에 근거한 수당에 대한 우위는 아직 많은 논의의 논의가 남아있다고 보인다.
기본소득과 다른 복지제도와의 관계, 그리고 재원문제
기본의 복지제도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 기본소득을 도입한다고 할 때, 기본소득이 기존의 제도를 어느 정도 대체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제도와 병립하여 운영될 것인지는 제도의 역할과 재정부담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제자가 상정하고 있는 상황은 아마도 기존 제도 중 기능적으로 완전히 중복되는 현금급여, 즉, 기초생활보장과 기초연금, 그리고 한국에는 없지만 아동수당이 있는 경우 아동수당 정도의 제도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이고, 주로 서비스로 제공되는(그리고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 의료나 교육, 범위를 좀 넓히면 돌봄이나 고용서비스와 같은 것은 대체하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로 보인다. 소득 비례적인 성격을 갖는 사회보험의 현금급여들과의 – 노령연금, 장애급여, 실업급여, 한국에는 없지만 복지 선진국의 경우 질병급여 – 관계는 분명하게 설명하시지는 않은 것 같다.
만약 기본소득이 기존의 복지제도는 ‘최대한’ 대체한다고 하면 이것은 복지의 ‘축소’를 전제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우파 버전의 기본소득이 될 것이며, 재정중립 상태를 전제한다고 할 때에도 기존에 ‘욕구’에 기초한 급여가 삭감되기 때문에 욕구가 큰 계층에게 불리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발제문 초반에 언급된 ‘2016 서울대회’ 참가자들의 합의에 어긋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기존 제도를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 그 위에 기초연금을 얹는 형태인데, 이는 상당한 추가 재정 소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에서 항상 행정비용 절감이 언급되지만, (1) 기존 제도를 최대한 유지할 경우 이 제도들, 특히 행정비용이 높은 사회서비스 제도들에 투입되는 비용에는 변함이 없고, (2) 상당히 많은 개인의 정보들이 전산화되는 추이를 감안하면 자산조사에 따른 절감도 그 효과가 유의미할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도입에는 상당한 수준의 증세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국민부담률이 높은 서구 복지국가의 경우는 증세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인구 고령화, 기존 복지국가의 성숙, 그리고 경제성장의 정체와 높은 실업률이라는 ‘영구적 긴축’의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있어서 기존 복지제도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기본소득 검토 기사가 난 핀란드 정부에서처럼 ‘재정중립 상태에서의 기본소득 구상’이 논의되는 경향도 나타나는데,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존의 사회적 약자의 혜택 감소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기본소득 논의 자체가 복지의 확대가 될 가능성도 복지의 축소가 될 위험도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상황은 조금 다르다. 발제자도 언급하는 것처럼 조세부담률이나 국민부담률에서 복지 선진국은 물론 OECD 평균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증세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여력은 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가 단체 설립 때부터 줄기차게 복지증세를 주장해온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어렵게 증세를 거쳐서 확보한 재원을 기본소득에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지는 의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본소득의 할당원리는 개인의 개별적 욕구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는 권리적인 측면의 장점은 있지만,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일까?’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증세의 어려움, 그리고 재원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기본소득은 명시적으로 대체하고자 하지 않는 제도와도 경합 관계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복지재원이 확대된다고 할 때,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 노인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기초연금 혹은 국민연금의 확대, 돌봄 및 요양서비스 공급체계의 질 개선, 장애인 대상 급여 및 서비스 개선, 실업자 대상의 고용서비스 개선과 같은 과제들과 기본소득은 경쟁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은 과제들보다 기본소득이 더 우선순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기본소득이 후순위라고 본다면, 이 과제들을 모두 만족시킨 후 기본소득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한국도 복지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영구적 긴축의 굴레 속에서 기초연금을 위한 어려운 증세 논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앞서서 기존의 복지제도에서 할당의 원리로 경제적 욕구 외에도 진단적 욕구, 기여에 대한 보상, 귀속적 지위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사용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그렇게 제도가 형성됐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무조건적 보편주의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선별주의와 보편주의의 일직선상에서 저나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보편주의에 가깝게 서 있겠지만, 완전한 보편성 원리 하나로 급여를 조직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
보편적인 원리에 기반을 두되 각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아동에게는 보육이, 학생에게는 교육이, 아픈 사람에게는 의료가, 장애인에게는 이동권이, 노인에게는 수발과 소득이 더 필요할 수 있다. 비단 ‘필요의 유형’이 다를 뿐 아니라 ‘필요의 정도’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증세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증세의 결과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재분배의 역설
증세를 이루어내고, 복지동맹을 형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보다는 또 다른 토론자이신 김영순 교수님께서 훨씬 더 전문가시기 때문에 저는 정치적 요인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발제 중에 ‘재분배의 역설’을 언급했는데, 코르피와 팔메는 재분배의 역설로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발제자께서 인용하신 ‘보편적 재분배가 선별적 재분배보다 그 효과가 크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발제문에 언급되지 않은 또 한 가지는 ‘정액급여보다 소득비례급여가 재분배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두 명제가 뒷받침되는 기본적인 논리는 비슷하다. 즉, 모든 이들의 복지의 수급자가 되고(1원칙), 중산층 이상은 그 복지를 통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급여를 받을 때(2원칙) 복지동맹이 더 튼튼해진다는 것을 담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내만복 내부에서 항상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 되는 내용이다. 연금제도와 관련한 영역에서 그렇다. 내만복 운영위원 중에는 기초연금 우선성을 주장하는 분도 있고 국민연금 중심성을 더 강조하는 분도 있다. 전자가 첫 번째 명제의 재분배 역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두 번째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 쪽에 가깝지만, 동시에 후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즉, 보편주의를 위해서는 물론 ‘적용범위의 보편성’이 아주 중요하지만 동시에 ‘급여의 적절성’이 보장되어야 복지동맹은 튼튼해진다는 것이다. 저나 내만복 내에서 기초연금 중심성을 주장하고 있는 분들은 그래서 기초연금의 기반 위에서 어떻게 중산층 이상에 대한 적정한 보장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항상 논의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기초연금보다도 더 이런 성격이 강하다. 물론 중산층까지 생활수준 유지가 가능한 수준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기본소득이라는 논의가 정말로 중산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논의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완전고용과 노동유인 문제
사실 개인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해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이 제도가 고용과 복지의 연계를 완전히 끊는다는 점에 있다. 뒤에 언급할 테지만 현재 노동시장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고용과 복지의 연계를 상당 부분 잘라내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기초연금을 지지하는 이유도 대부분은 이 문제에 있다.
발제자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우선 기존의 제도 하에서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며, 기본소득이 총수요를 늘리고, 경제주체들의 모험심을 자극함으로써 완전고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수요에 대한 부분은 소득주도성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고, 적어도 단기에 있어서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완전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다소간 장밋빛 전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기본소득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성과는 노동시장의 공급측의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이들의 구매력이든 모험심이든 그렇다. 하지만 저는 과연 ‘노동시장 공급측면의 변화가 수요 측면의 변화를 자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간 의문이다. 고용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노동시장 공급측 보다는 수요측에, 즉, 사회정책보다는 경제정책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제가 고용과 단절된 복지제도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이 고용상황 자체를 바꿀 것이라기보다는 고용상황과 무관하게 개개인의 삶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사실 기본소득의 중요한 필요성의 근거로 사용되는 ‘제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라는 배경에 대한 논의도 더 이상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사회를 상정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완전고용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좀 과도해 보인다.
물론 모두가 4시간씩 일하는 사회를 상정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완전고용’이라고 이야기하는 맥락과는 상당히 다르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그렇다.
노동과 복지의 맥락에 또 한 가지 기본소득이 직면하는 문제는 ‘노동유인 문제’다. 발제자께서는 노동을 늘리면 급여가 줄어들기 때문에 노동유인을 약화시키는 선별복지에 비해 기본소득은 그런 문제가 적다고 하셨다. 또한 독일에서의 실험 결과 베짱이는 없더라는 이야기도 소개하셨다.
저도 개인의 노동유인이 여가-소득 선택모형에서만 결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욕구나 행동동기는 다차원적이고 따라서 단순히 ‘복지가 증가하면 일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와 비교할 때, 무조건적으로 노동연령대 인구에게 급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난 수백 년간 자유주의⋅자본주의의 핵심 교리였던 ‘자조(self-help)’를 가장 완전하게 부정하는 할당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 자체가 얼마나 타당하냐 이전에 많은 사람들의 직관적 정의관에 반할 가능성이 있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투표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을 덜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한 번 생각해볼 만하다. 여가-소득 선택모형이 인간의 노동 동기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부분적인 설명은 할 것이라고 보면 기본소득의 도입은 분명히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줄일 것이다.
나는 기본소득의 노동유인에 대한 설명이 이런 부분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노동 동기는 줄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어차피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던데. 이런 관점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결론
앞서서 잠시 언급했지만,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분절화, 불안정화의 문제는 기존의 안정적 고용을 전제로 하여 조직된 복지제도의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로봇의 부상과 4차 산업혁명은 지금 있는 종류의 일자리마저 미래에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게 하고 있다.
노동과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보상, 그리고 일시적⋅예외적으로 그것이 단절되었을 때 지급되는 복지라는 기존 복지국가는 지속가능성을 위협받고 있고, 그렇게 때문에 어떤 책 제목처럼 ‘분배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기본소득은 이와 같은 ‘분배의 재구성’의 최전선에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많은 논의와 비판이 있고, 저 자신도 앞서서 비판적으로 검토했지만,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고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는 하나의 대안으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취하고 있는 할당의 원리로써 ‘순수한 보편성’은 과연 이것이 최적의 방안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던져준다.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가장 유명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근래에 다양성(diversity)이 보편성에 관한 가장 큰 도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민의 증가, 중산층의 욕구의 다양화 등으로 인해 기존의 ‘동일성’에 근거한 보편주의 원리가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보편성’이라는 기초 위에 어떻게 다양한 욕구를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의 할당의 원리는 기존의 보편주의 복지국가보다도 더 극단적인 보편성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현금이니까 받아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욕구의 다양성은 단순이 필요한 것의 ‘종류’가 다를 뿐 아니라 필요한 것의 ‘정도’도 다를 것임을 함축한다.
신체 건강한 성인부부가 거주하는 가정과 노인, 장애인, 아동이 거주하는 가정은 욕구의 유형와 정도가 모두 다르다. 그렇다고 이 욕구의 다양성을 모두 만족시킨 후에 그 위에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 급여의 수준이 의미 있는 수준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 재원이 얼마가 됐든 유한할 수밖에 없는 재원의 한계 안에서 개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기본소득이 충분한 검토와 논의, 경우에 따라서는 실험이 필요한 미래의 가능성이지만, 현재의 대안으로서는 여전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현대 복지국가가 직면한 복잡다단한 문제를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문 : 사회디자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