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이 글은 4년 전 발행된 글로, 최근의 친북 논란에 일침을 꽂는 좋은 내용이라 허락 하 공유합니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에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하신단다. 그 위원장께서는 “친일보다는 친북이 국가적으로 더 중차대한 문제”라고 기염을 토하셨는데 무려 5천여 명의 면면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100명으로 압축, 발표를 앞두고 있다는 낭보를 전해 들었다.
친일 얘기하면 빨갱이가 되었던 해방공간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의지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신으로 ‘친일사전’에 ‘친북사전’으로 맞서겠다는 저 가없는 창의력에는 하염없는 경외감 이외에는 드릴 것이 없다.
과거 보도연맹이나 기타 등등 죽창으로 찌르고 총알을 먹이고 칼로 쑤셔 마땅한 빨갱이 목록을 작성하는 데는 타고난 자질을 보였던 대한민국 보수 우익이 작성한 ‘신들린 리스트’의 정확성을 부정하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천려일실, 빠뜨릴 지도 모르는 악질 친북 인사 몇 명을 추천하고 싶을 뿐이다.
1.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2대 3대 대통령)
상기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암약하며 6.25가 발발하자 자신은 대전으로 일찌감치 도망가면서도 라디오 녹음으로는 “자신은 끝까지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허풍을 떨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신뢰를 극적으로 무너뜨리고 수도 서울을 사흘만에 인민군에게 내 주는 사악한 공작을 폈다.
백척간두의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헌병을 동원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군은 물론 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느니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쪽이 가능성이 크다”는 외신 기자의 비아냥을 살 정도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손상시킨 바 있다.
또한 국민방위군 사건 때에는 생때같은 장정들의 피복과 음식을 가로채 기생 치마폭에 쏟아 붓고 호의호식을 일삼았던 장교들을 구원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던 바, 일련의 행위들은 대한민국 국군의 약화와 민심 이반을 노린 북한의 지령에 충실히 따랐던 것이 확실시된다.
2. 신성모 (국방부 장관)
상기인은 국방의 총책임자로서 “우리 국군은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일견 허황해 보이나 면밀히 계산된 발언을 일삼으며 국군의 정신전력에 막대한 손상을 입힘으로써 전쟁 초기 국군의 몰락과 인민군의 강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쟁 발발 3일 내내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떠벌임으로써 100만 시민과 수도 서울을 고스란히,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북한 정권에 헌납했다.
국군 통신 부대의 주요 장비와 수천 명의 피난민의 목숨을 앗아간 한강다리 폭파 역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신성모의 작품으로 추정되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단지 명령을 받아 스위치를 눌렀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만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을 뿐이다. 최창식이 신성모의 친북 행위를 눈치 채고 고발하려다가 먼저 당하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위에 언급된 이승만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펑펑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김일성이나 김정일만 보면 눈물 흘리는 조건반사가 일상화된 후대의 북한의 모습의 원형으로 평가된다.
3. 채병덕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별명인 코끼리는 북한 연락부 암호명으로도 사용되었다고 추정)
이 사람에 대해서는 할 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군의 원로 이형근 장군이 10대 의혹을 제시하며 그의 행적에 시비를 걸었거니와, 6월 24일 밤 국군 고위 장교와 미 군사 고문단이 흐드러지게 벌인 술판의 호스트였고, 남침의 첩보가 잇따르는 가운데 쭈욱 지속되어 왔던 비상 태세를 해제하고 장병들을 휴가 보낸 것도 그였다. 또 똑똑한 대전차포 하나 없는 가운데 무적의 독일군을 혼냈던 T-34를 몰고 들이닥치는 인민군에 대항하여 무리한 반격 작전을 벌여 소중한 병력을 소진시켰으며 부하들의 한강 방어선 활용 주장도 깡그리 무시했다.
이것만 해도 제 5열의 혐의가 굳어지는 바, 앞서 언급된 한강교 폭파는 그 절정이었다. 이야말로 한강 이북에 존재하던 국군 5개 사단의 퇴로를 끊어 버린 망동이었으며 군 수뇌부에 암약한 친북 간첩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 행위였다. 무능을 가장하여 교활한 친북 행위를 자행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노골적인 이적 행위를 벌이는 바람에 이용가치가 다했고 기밀 누설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듯, 신성모는 참모총장직을 박탈당한 채병덕에게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고 종용했고 그 명령에 따라 최전방에 섰다가 우군인 인민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보여 주는 꼬리자르기 전술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4. 볼드모트 (그 분의 아버지)
이 사람이 빠진 친북인명사전은 앙꼬없는 찐빵이요 겨자 없는 냉면이라. 대구 폭동의 주역으로 감히 구미경찰서를 들이치고 경찰서장 이하 경찰들을 겁박했던 간 큰 공산주의자 선산군 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 박상희가 그의 형이고, 국대안 반대투쟁울 하다가 군대로 피신한 젊은 좌익의 처삼촌이다. 이에 질세라 그는 노동당의 군 세포 책임자였다. 혁명열사 집안도 이런 혁명열사 집안이 없다. 여순반란 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친북분자의 증거다.
이후 전향했지만 끝내 북에 대한 친밀감을 버리지 못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북한의 의도가 번영된 7.4 남북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친북 인사들이 즐겨 운위하는 구실을 허용하고 말았다.
5. 볼드모트 2 (중앙정보부장부터 총리까지 다양하고 희한한 약력)
박정희 가문 못지 않은 혁명가 가문의 일원이다. 미국 대사관 직원인 그레고리 헨더슨이 1963년 본국에 보낸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하여 그가 친북인명사전에서 빠질 수 없는 위인임을 피를 토하며 폭로하고자 한다.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몇몇 인사들이 있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살아 있다면(그럴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 있을 것이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
이런 친북인사가 대한민국에서 50년째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친북인명사전은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
6. 전두환 (제 11대, 12대 대통령)
광주의 반정부 난동분자들을 진압하고 철부지 대학생들을 때려잡고 ‘녹화사업’을 기획하는 등 좌익 척결에 공이 있어 보이나, 자신의 목숨을 노린 아웅산 테러 이후 정당한 보복은 커녕 비굴하게도 심복 장세동을 밀사로 보내어 대화를 구걸하는 친북적 행태를 노출하고 말았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허담 등의 북한 밀사와 교감을 나누는 등 친북인명사전 등재에 하등 흠이 없는 행적을 보였다.
또한 현재 전 재산 29만원 밖에 없는 무산 계급으로서 친북좌익 세력의 포섭이 용이하다는 현재적 상황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7. 정주영 (현대그룹 왕회장)
이 사람을 친북세력으로 분류하는 데는 많은 고민이 따랐다. 빨갱이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박아 가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고 황량한 울산만을 굴지의 공업 도시로 탈바꿈한 공로는 취할만하다. 그러나 눈물을 머금고 나는 그를 친북인명사전에 등재할 것을 호소한다.
강원도 미수복지역인 통천 출신으로서 끝내 지역적 연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향을 돕는다는 미명으로 엄청난 달러를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진상하였으며, 소 수천 마리를 조공품으로 북한에 바쳤다. 북한은 남한의 혁명 열사들의 이름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습관이 있는 바, 통혁당의 김중태나 서울대생 박종철 등의 이름도 북한의 학교나 기관에 어김없이 내걸려 있다. 그런데 저 적도 평양 한복판에 정주영 체육관이 위용도 찬란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친북의 증거가 아니랴. 친북인명사전이 정주영 이름 석 자를 뺀다면 그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그 효용은 먼지처럼 산산이 흩날리리라.
8. 김병관 (동아일보사 회장)
원래 이분은 친북인명사전에 올라서도 안되고 올라설 수도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단 한 차례 실수로 그만 사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상기인은 말도 안되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 수십 명이 강 건너 와서 국경 외딴 마을을 잠시 점령하고, 반항하는 일본 요릿집 점원 하나 죽이고 다시 강 건너간 사건인 보천보 전투를 다룬 동아일보 호외 원판을 가져다가, 세상에 도금도 아니고,금 1.2 킬로그램을 들여서 장식해서는 민족의 공적 김정일에게 그 아비의 기념이랍시고 고이 전해 바쳤다.
민족 유수의 일간지가 허위로 그득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를 황금으로 도배하여 전달하다니 대체 국가보안법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이적단체 고무 찬양 조항은 쉬었는가 썩었는가. 이런 친북적인 작태가 횡행하는 동안 도대체 국정원은 공으로 월급받아 먹고 있었는가. 참으로 피를 토할 일이다. 친북 인명 사전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김병관 회장을 존경한다. 그러나 공은 공 사는 사다 ^^ 저런 행적이 친북인명사전에서 빠진다면 그건 정말이지 화장실 휴지로도 못쓸 종잇장들의 묶음에 불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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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정체를 숨긴 채 대한민국 곳곳에서 설치류처럼 서식하고 있는 친북인사들은 수없이 많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의 노력과 혜안을 통해 그들의 정체가 일망타진 공개되기를 앙망하는 바이다. 친북인명사전 편찬자들의 건투를 빈다. 이렇게 알려 줘도 저 위의 기라성같은 친북인물들이 사전에서 빠진다면, 나는 사전 편찬자들의 친북성과 사상을 의심해 보고자 한다. 핸드폰에 111 을 입력시켜 놓고 지켜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