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성숙 네이버 차기 대표이사 내정자는 사용자의 작은 목소리와 서비스 구석구석까지 살피는 섬세함…”
또 들어갔다, 그놈의 ‘섬세함.’
2.
구글에서 ‘차기’ ‘임명’ ‘섬세함’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면 등장하는 기사들은 대개 여성임원의 임명 소식이다. 대규모 조직이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것도 아니고… 섬세함을 기준으로 남성 임원을 뽑는 게 아니면 여성 임원도 섬세함으로 뽑는 게 아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일에 미친 사람을 뽑는 것일 뿐.
물론 저 내용은 ZDNet이 쓴 게 아니라 네이버 자체의 발표내용이므로 기자를 탓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한성숙 부사장이 실제로 섬세한 분일 수도 있다. (직접 접해본 사람들이 전해주는 설명은 좀 다른 듯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모르는 분이니 알 수 없다).
3.
하지만 여성 행장, 여성 임원, 여성 CEO가 탄생할 때마다 ‘여성의 섬세함’을 이야기하는 건 (게으른 기사 쓰기의 가능성을 배제하고라도) 좋은 태도가 아니다. 섬세하지 않은 여성이라면 굳이 남성 대신 CEO로 뽑을 필요가 없다는 인상을 주고 그 결과,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특정 성 역할을 슬그머니 강요한다.
그런 비난을 피해 가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말이 “섬세하면서도 과감하다”는 말인데 (네이버의 발표에도 등장한다), 이 말에 깔린 의미는 “남자들은 과감하기만 한데, 이 여성은 과감한 것에 더해 섬세하기까지 하다”는 것.
언뜻 보면 칭찬처럼 들리지만, 이 역시 ‘여성임원이 섬세함을 갖추지 못했다면 굳이 그 자리에 여성을 뽑지 않아도 된다’는 남성중심사고가 존재한다. 현대 여성들이 앓고 있는 슈퍼우먼증후군은 이런 사고에서 비롯된다.
4.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과거 같았으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라고 썼지만 요새는 “여성 특유”라는 말은 직접 넣는 대신 암시만 한다. 그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우리의 딸들은 빠르게 자라고 있다.
물론 여성을 리더로 뽑아도 반드시 섬세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학습시키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다행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섬세함의 부족이 그분의 실패 원인이라고 생각할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냥 일 잘하면 뽑히는 거고, 못하면 잘리는 거다. 남자든 여자든 섬세함을 원하는 분은 애인에게서나 찾으시라.
원문 : 박상현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