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패배하자 한겨레 경향 등 소위 진보언론은 물론이고 진보학자들, 시민단체, 지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은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평가였다. 나는 이런 진보진영의 인식을 보며 2017년 대선에서 또다시 패배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하였다.
선거는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다’는 식의 자신감 부여를 통해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건 스포츠 경기에나 통하는 것이지, 선거는 스포츠가 아니다.
‘질 수 없는 선거’라는 것은 없다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뒤집으면 ‘이길 선거를 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근거는 무엇인가? 이명박이가 실정을 했으니까? 분위기가 그래서? 나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걸까? 나는 오히려 ‘현실 파악이 어렵구나’는 생각을 했다. 과거 80년대 운동권 진영은 ‘국민들은’, ‘백만 청년학도들은’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가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전제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뜻’, ‘민중의 뜻’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현실보다 부풀린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과에 대한 의미를 과장한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떠들고,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세상이 올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역대 대선을 간단히 리뷰하면 야권은 늘 ‘이기기 힘든 선거’를 치렀다. ‘이길 수 있는 선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김대중의 당선은 보수세력 김종필의 충청도와 손을 잡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기업들이 줄줄이 나가자빠지고 나라가 망했는데도 그랬다. 김영삼 대통령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김종필 손 잡은 걸로도 부족해서 이인제가 경상도 표를 갈라줘서 이겼다. 겨우 39만 표(1.6% 차이) 이겼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는 더욱 기적적인 승리였다.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무조건 패배하는 선거였다. 당시 국민의정부는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두 아들의 비리 혐의, 측근들 부패로 도저히 정권을 지탱하기도 버거운 처지였다. 김대중 지지는 야권 고정 지지층 말고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이 승리한 건 순전히 ‘노무현의 개인기’라는 설명 말고는 해석이 안 된다. 그래서 겨우 57만 표(2.3%) 차이로 이겼다. 정몽준과의 단일화 효과도 있었다. 조선일보의 마지막 선동은 실제 투표장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데 야권, 특히 진보입네 하는 사람들은 두 번의 승리를 ‘실력’으로 착각한다. 심지어 2002년 대선의 승리도 자신들의 실력이라고 여긴다. 그건 노무현의 실력이지 야권의 실력이 아니었다. 당시 선거운동은 개판이었다. 아무도 노무현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유시민 같은 사람들, 그리고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뛰쳐나가서 개혁당 만들고 인터넷에서 글쓰고 그러면서 승리했다. 한 표를 보태주는 건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실력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정동영이 호남으로 회귀하면서 처참하게 박살 난 2007년 대선은 언급도 하지 말자. 딱 야권 고정 지지층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계기였다는 의미가 있다. 26.1%. 이게 야권 고정지지층이다. 김대중 노무현은 여기에다 바깥에서 벌어와서 대통령이 된 거다. 진보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3-5%다.
2012년 대선은 어떤가? 보수-진보가 그야말로 1대 1로 붙었다. 양쪽 모두 표를 박박 긁어모은 첫 선거였다. 그 결과 3.5% 졌다. 이명박이 4대강 삽질을 하고, 국가부채 엄청나게 늘어나고, 민주주의와 인권 후퇴하고, 언론인들이 해직을 당했다. 그래도 졌다.
대대로 내려온 “보수의 나라”
빨리 현실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보수의 나라’다. 한 번도 진보가 우세했던 적이 없는 나라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보수파와 손잡고 탄생한 정권이지 소위 진보들의 실력으로 탄생한 정권이 아니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니까 2012년 대선 결과에 대해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헛소리를 하게 된다.
홍영표 의원이 ‘2012년 대선 백서’를 발간하면서 폭로한 바 있다. 문재인 캠프를 제외하고는 당 차원에서의 선거운동은 사실상 없었다고. 경선에 참여했던 경쟁자들 전부 남의 선거처럼 손 놓고 있었다. 그렇게 선거운동하고도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문재인 캠프는 노쇠화되었다. 다들 나중에 한 자리 할 어르신들만 바글거리고 실무를 할 사람들은 별로 안 보이더라.
왜 이런 일이 생긴 줄 아나? 다들 야권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당연히 정권교체가 될 거라고 전제하고는 경쟁자들은 문재인 떨어져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선거운동 안 하고, 문재인 캠프엔 선거 후 논공행상 바라는 사람들만 바글거리고 실제로 일할 사람은 별로 없게 되는 거다. 단순히 이런저런 야권 표 다 합치면 당연히 이길 거라는 산수 수준의 덧셈도 한몫한 것이고.
2017년 대선을 앞둔 지금 분위기는 어떤가? 내가 보기엔 당연히 야권이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하지만 선거는 자신감으로 되는 게 아니다. 심지어 스포츠 경기도 자신감 잔뜩 불어넣는다고 되는 게 아닌데 하물며 선거가 자신감으로 될 것 같았으면 왜 대한민국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 이후 김대중 노무현 딱 두 번 밖에 못 이겼냐고.
목소리만 정의롭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대선까지 1년 2개월 남았다. 새누리당은 박근혜의 국정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정비할 수 있다. 당명 바꾸고 리모델링하고, 새로운 인물 내세우고 정책 개발하고, 구세력 몰아내고 그렇게 하고, 보수 우위의 여론을 등에 업고 박근혜와 차별화하고 그러면 다시 한 번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지금 탄핵이니 하야니를 외치는 바탕에는 정권교체가 당연히 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렸다. 박근혜 몰아내거나 물러나면 그 자리가 우리 자리가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아 진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탄핵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박근혜가 하야하면 그다음은 또 어떻게 되는 건데? 이런 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저잣거리 장삼이사는 그냥 뭐 감정대로 막 떠들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정치인이라는 작자들이 그 장삼이사들 이끌고 다니며 탄핵탄핵 외치면 그게 골목대장 놀이밖에 더 되나? 기껏해야 그 사람들 나중에 더민주당을 향해서 별의별 욕 다 할 사람들이다. 다수당 만들어줬더니 탄핵도 안 하고 뭐하냐고 유권자 갑질, 진상 손님 수준으로 한다.
주제 파악 좀 하면서 살자. 2012년 대선에서 51.6 대 48.0으로 졌다. 부족한 2.1%는 어떻게 할 건지나 생각해봐라. 난 2017년 대선도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대한민국은 보수 우위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2012년 대선 결과가 쉽게 뒤집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다. 야권이 열세에 있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당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살자. 목소리만 정의롭다고 정의로운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진작에 유토피아 만들었을 것이다. 내년 대선 이길까 말까 하다.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자.
원문 : Soon Wook Kwon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