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을 네 번 갔다고 말하면 대체로 반응이 비슷하다. 부럽다, 혹은 뭐하러 네 번씩이나? 이런 반응에는 “한 번 봤으면 됐지, 가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지청구도 숨어 있다. 파리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그래 봐야 네 번이 전부지만) 오르세를 빼놓지 않고 들르는 것은 첫 경험 때문이리라.
그곳에서 고흐의 그림을 처음 만났다. 교과서나 책에 있는 그림 말고 실제 그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함께 간 일행은 고흐의 그림을 소리로 표현하듯 짧지만, 강렬한 감탄사를 쏟아냈다. 와우!
고흐의 ‘오베르 교회’에서는 정말 광채가 났다(나는 그 광채를 분명히 보았다). 고흐만이 아니었다.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에서는 마치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도회 그림에서도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잔의 사과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 둘째는 뉴턴의 사과, 셋째는 세잔의 사과다’라는 말이 괜한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그때 처음 알았다. 왜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 가는지.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유명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면 왜 미술관 건물을 몇 바퀴 돌 정도의 줄이 만들어지는지. 피곤함보다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그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는지. 또 한 가지 사실도 알았다. 왜 그림을 ‘읽는다’고 하는지. 가끔 그림이 말하려고 하는 얘기를 너무 듣고 싶다. 그런데 잘 들리지 않고 읽히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이주은의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손철주와 이주은이 함께 쓴 <다 그림이다>, 진중권의 <서양 미술사>, 이주헌의 <지식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과 같은 책들이 그래서 고맙다. 이 책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고 안 들리지? 그러면 내가 전해줄게. 그 그림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화학자가 미술관에 간 이유는?
<미술관에 간 화학자>도 그림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들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여느 ‘그림책’과는 다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화학자의 눈으로 그림을 본다(읽는다). 저자 전창림은 한양대 화학공학과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파리 국립대에서 고분자 학위로 박사학위를 받은 화학 공학도다. 화학자가 미술관에 간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술은 화학에서 태어나 화학을 먹고 사는 예술이다.”
14세기 초 조토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에서 천문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별을 따라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유럽우주기구는 지난 1985년 핼리 혜성 탐사를 위해 발사한 우주선을 ‘조토’라고 명명했다.
조토는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 저자는 그 비결을 물감에서 찾는다. 조토는 ‘동방박사 경배’에서 프레스코와 템페라를 덧칠하는 방식으로 종전의 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효과를 냈다. 지금으로 치면 물감을 이용해 일종의 ‘3D’ 효과를 낸 것이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도 화학성분(물감)이 포인트다. 저자의 분석은 이렇다.
“이 그림을 다룬 소설과 영화에서는 화학자들에게 흥미를 일으킬 만한 ‘진사’라는 원광에서 얻는 버밀리온, 청금석에서 얻는 울트라 마린 등의 안료와 그 원료들을 처리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베르메르는 노란색과 파란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특히 노란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베르메르의 또 다른 대표작 ‘우유를 따른 여인’도 그가 좋아했던 노란색 윗도리와 파란색 치마를 입었는데 그 색감은 정말 놀랍다.”
화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물감
미술사 책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는 불포화지방산과 유화 탄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에이크의 섬세한 붓 터치 비법은 불포화지방산을 함유한 ‘아마인유’라는 안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불포화지방산은 녹는점이 낮아 상온에서는 액체 상태로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포화기가 굳어져 단단한 막을 형성한다.
에이크는 바로 이러한 성질을 물감에 이용했다. 광택을 내는 불포화지방산이라는 화학 물질이 유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때로는 물감에 사용하는 성분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미국 출신의 화가 휘슬러는 흰색을 주로 사용하는 ‘화이트 홀릭’이었다. 그런데 흰색 물감에는 납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결국 휘슬러는 납 중독으로 사망한다. 흰색 물감 중에서도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연백(lead white)의 유혹은 많은 화가들에게 납중독의 위험을 망각시켰다.
저자는 “화이트 홀릭 화가였던 휘슬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흰색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보고 있으면 처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서양에서만 강한 독성의 물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옛 그림에도 그런 흔적이 묻어 있다. 신윤복의 대표작 ‘미인도’는 지금도 색감이 생생하다. 치마는 옥색이요, 속치마 고름은 붉은색이다. 여기서 붉은색 역시 진사라는 광물에서 추출한 것으로 주정부는 황화수은이다. 독성이 강한 대신 색깔은 강렬하고 변색도 안 된다.
변색이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렘브란트의 ‘야경’과 밀레의 ‘만종’이다. ‘야경’은 원래 밤 풍경을 그린 게 아니라 대낮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 ‘버멀리온’이라는 선홍색 물감을 사용했다. 이 물감을 분석해 보면 납과 황 성분이 나온다. 납과 황이 결합하면 공기 중에서 검게 변하는 흑변 현상을 일으킨다. 이런 현상은 밀레의 ‘만종’에서도 나타난다.
화학을 알면 그림이 보인다
미술과 과학은 의외로 가깝다. 익히 알려져 있듯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를 남긴 위대한 화가인 동시에 헬리콥터를 설계하고 해부학 도감을 그린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다. 역사상 미술사조 가운데 가장 많이 사랑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인상주의는 그 자체가 과학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화실 밖으로 나와 매 순간 변화하는 자연의 신비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스펙트럼의 과학을 예술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책에는 군데군데 ‘미술관에서 나누는 과학 토크’를 넣어 미술을 통해 이런 과학 상식을 전한다. 휘슬러의 ‘흰색 교향곡 2번’을 통해 납의 문화사를 다루고, 라이트의 ‘에어 펌프의 실험’에서는 산소를 발견한 3명의 화학자를 소개한다. 또 김홍도의 ‘씨름’을 통해 같지만 같지 않은 입체이성질체를 설명하고,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으로는 청동의 진화를 다룬다. 이 밖에도 양자역학과 터널링 효과, 산소의 발견, 거울의 반사 원리 등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도 미술 관련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은 책에 수록된 명화 감상이다. 책을 펴면 고흐와 모네, 마네, 르누아르, 마티스, 세잔,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다빈치, 다비드의 작품은 물론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의 그림이 빼곡하다. 과학적 상식뿐 아니라 그림 감상하는 재미도 적지 않다.
저자는 ‘창조’라는 말이 유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던 것일까? 2007년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학과 예술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둘은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과학도가 예술 작품을 접할 기회를 많이 가질수록 창조적인 업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원문 : 책방아저씨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