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토머스 프리드먼이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고 선언했을 때, 그 평평한 세계란 지역 간의 차이, 또는 교통과 소통을 막는 장벽이 사라진 세계를 의미했다. 하지만 닉 수재니스가 애벗의 수학 우화에서 빌려온 ‘평평한 세계(flatland)’란, 위아래라는 하나의 차원이 사라진 세계이다.
주어진 평면에서 정해진 방식대로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삶의 세계. 수재니스는 만화를 통해 다른 차원을 상상하고 통합하는 (누군가는 ‘창의적’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겠지만) ‘비판적 차원’의 사고방법을 보여주고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덕분에 역사상 가장 기괴한 교육학 박사 논문이 탄생했다. “언플래트닝: 다차원에서의 학습을 위한 시각-언어적 탐구(Unflattening: A Visual-Verbal Inquiry into Learning in Many Dimension)”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리고 하버드 대학 출판부는 이 만화의 탈을 쓴 논문 혹은 논문을 가장한 만화를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당신이 (공짜로 선물 받으면 더 좋겠지만) 반드시 사서 읽어야 하는 올해의 책, <언플래트닝 : 생각의 형태>가 탄생한 경위다.
1.
책을 읽을 때 내 버릇은 참고문헌부터 보는 것이다. (좋지 않은 버릇이니 따라할 필요는 없다.) 참고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건, ‘수재니스의 독서가 대중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주제를 다룰 때 읽었어야 했을 저자나 책들이 빠져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참고문헌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서평들이 좀 한심해 보였는데, 내가 보기엔 책이 다루는 주제에 비하면 의외로 빈약한 참고문헌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더욱 놀라운 성공작이다. 자신이 읽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의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썼으되, 책의 규모로 짜깁기를 하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책 전체를 끌고 나가는 저자는 흔치 않다.
2.
‘어떻게 고정된 관점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까, 고정된 관점이란 무엇이고 또 입체적인 사고란 무엇인가.’
이렇게 시각적 사고를 통한 학습이란 주제를 오랫동안 고민해 온 사람만이 이런 책을 쓰고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양한 출처로부터 온 이미지와 생각의 단편들이, 그가 말하고 싶은 주제를 중심으로 한 권의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생각을 형성시키는 과정이 바로 이것과 같다.
이 과정이 얼마나 성공적이냐는 각자 다르겠지만, 수재니스의 성공적인 이 작품은 하나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다양한 소재와 관점을 통합(integration)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은 바로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수재니스와 대화해야 할 주제도 바로 그것이고. 그러니 들뢰즈와 바흐친과 마르쿠제 혹은 망들브로트 등이 언급된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3.
평평한 세계, 고정된 관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점에 대해 수재니스는 직접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근대 과학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고정된 관점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건, 그것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가능하게 만든 관점이나 시각, 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우리는 성공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다른’ 입장이나 시각을 배제하면서 대화는 사라지고 토론은 전쟁이 된다.
하지만 하나의 시각은 늘 불완전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시차(parallax)이다. 양 눈의 시차를 통해서 거리(깊이)를 짐작하고 대상에 대한 입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듯이, 하나의 시각은 불완전하다. 토론을 둘이서 추는 춤으로 보자는 레이코프와 존슨의 제안, 다성적인 소설이론을 전개한 바흐친의 제안, 탈중심화된 리좀 구조에 대한 들뢰즈와 과타리의 제안 등, 수재니스는 여러 곳에서 이 주장을 뒷받침할 친구들을 불러 온다.
이렇게 다른 방향, 다른 차원의 시각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현재 상태’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방법을 보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의 ‘닫힌’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 다른 시각을 통합해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4.
수재니스는 비유와 유비의 함정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비유를 바꾸어간다. 그가 만일 장자를 읽었다면 달과 손가락의 그림을 볼 수 있었을 거다. 지도와 같은 평면의 세계에서는 ‘위’가 ‘북쪽’을 가리킨다. 하지만 평면에서 입체로 넘어가는 순간 ‘위’는 더 이상 ‘북쪽’이 아니라 새로운 ‘위’가 된다.
이 비유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계속 새로운 방향을 찾아 움직여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재니스는 ‘안과 밖’의 새로운 유비를 제시한다.
새로운 차원을 찾는다는 건 우리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안과 밖’을 만들어내는 것의 하나는 ‘언어’이다. 언어가 만들어주는 현실이라는 경계가 바로 평평한 세계의 한 가지 모델인 것이다.
우리가 ‘언어’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면 언어가 생각의 한계일 것이고, 우리는 언어의 밖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의 밖에서 생각을 돌아본다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생각은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재니스는 시각적(혹은 감각적, 비언어적) 사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각에 대한 오랜 철학적 폄하를 비판하는 논의를 다 따라가며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수재니스의 제안을 따라 자신의 언어를 돌아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사로잡혀 있는 언어의 함정 혹은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시각과 언어를 넘나들면서 그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필요할 때) 생각의 형태를 바꾸어나갈 것인가?
팁: 부록으로 실려있는 수재니스의 초벌 그림과 이미지에 대한 노트를 읽어보고 본 그림을 다시 보라. 어떻게 이미지와 언어가 상호작용하며 생각을 만들어가는지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연쇄적인 것과 동시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두 가지 축이다.
5. 중간점검.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일까? 만화에 대한 철학적 찬사(A philosophical tribute to the tradition of comics)? 시각-언어 통합적 사유를 통한 다차원적 사고에의 입문서? 만화 덕후라면 한 번 저질러보고 싶었을 특이한 박사 논문? 혹은 한국에서 어떤 집단에서 그렇게 한 번 팔아보고 싶었던 표현인문학 혹은 창조적 인문학의 모범적 사례?
물론 모두 다 해당되겠지만, 내겐 당장 그림부터 배우고 싶어지게 만드는 강렬한 유혹이다. 오래 전부터 기획해 온 책들을 이런 포맷으로 다시 쓰고 싶어질 정도로. 들뢰즈-가타리가 수재니스와 같은 재능을 갖고 있었다면 <천 개의 고원>의 두께는 훨씬 얇아졌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6.
이쯤에서 사소한 시비. 모든 만화가 수재니스의 관점에서 다 성공적인 않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이 책을 만화 보는 핑계로 삼으면 곤란하니까!
이 책은 절대 소년만화라는 이름의 포르노들에 대해서까지 사면부를 제공해주는 책이 아니다. (도대체 그 만화를 통해 어떤 시각-언어 통합적 사유가 확장되겠는가?) 그보다는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할 때, 그것을 어떤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인 독서 연장 방법일 것이다.
7.
이제 이 책의 딱 절반까지 왔다. 현대 문명 혹은 우리의 일상적인 ‘평평함’에 대한 우울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해서 시차에 기반을 둔 ‘다른 시각의 통합’과 그 힘에 대해 논의한 후, 시각-언어 통합적 사유의 방법과 가능성에 대해 다루었다.
이미지와 이매지네이션(상상력)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가 ‘다른 시각을 통합’한다고 했을 때, 그 통합이란 억지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그 간극은 두 개의 마주본 절벽처럼 좁혀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서 그곳에 다녀와야 한다. 이미지는 그것을 돕는다.
그러한 능력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고 집단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차원에서 당신은 어떤 풍경의 일부인가. 이야기의 차원에서 당신은 어떤 소설의 등장인물인가.
이 이미지-이야기의 구성은 우리를 남들과 구별시켜주는 동시에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갇혀 있는 평평함이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학습이란 나와 사회를 동시에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개인적인 ‘창조적 생각의 기술’ 매뉴얼을 바란 분들께는 거창한 이야기겠지만, 이 책이 원래 교육학 논문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혼자서 하더라도 학습이란 사회적인 것이다. 혼자서 남들보다 치고 나가는 승리의 비법 같은 게 아니다. 꽉 막힌 ‘평평한 사고’로 당신을 괴롭히는 상사는 바로 그렇게 남들보다 먼저 치고 나간 존재들이다.
입체적 사고란 사회적 학습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입체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낯설게 보기를 통해 경이로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만 낯설게 보기를 통해 창조적 사고를 한 사람들이 결국 자신을 소외시켜 고립된 채로 외롭게 죽어간 역사 또한 유구하다. 결국 나를 인형처럼 조종하는 끈을 끊어버리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방은, 새로운 좋은 연결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8.
물론 학습이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생각(머리)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각이 함께 바뀌는 것이다. 교육학 박사답게 수재니스는 그런 측면도 빠뜨리지 않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학습의 성과는 ‘습관을 바꾸는 것’이라는 오래된 (늘 새롭게 지적되는) 지혜를 깨닫는 사람은 적다.
소크라테스가 ‘음미(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했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앉아있어야 한다고 말한 게 아니다(그런 오해가 철학을 망가뜨렸다). 움직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역동성, 힘의 벡터가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
변화는 새로운 흐름이 되어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이 책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니까. 자꾸 ‘시각’을 말하다보면 독자들이 착각하니까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해야 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의 또 다른 성격이 나타난다. 이 책은 현대적인 학습이론을 직관적으로 설명해주는 책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의 방식을 바꾸어나간다는 점에서 구성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재미가 없으니 수재니스는 그걸 ‘보여주려고’ 했다. 당신이 평평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벗어나 입체적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으라는 얘기다. 그건 당신의 상호작용 전부를 바꾼다는 뜻이다.
9.
정말 비판적인 감상. 이 책의 내용에는 새로운 게 없지 않냐고, 또 생각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지 않냐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담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거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뚝딱 시키는 대로 되는 게 바로 전형적인 ‘평평한 삶’이다.
입체적 사고란 각자의 평평함에서 고유한 벡터를 가지는 거다. 수재니스는 시각과 언어의 상호작용을 직접 만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미처 배우지 못한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교육자의 역할이라면, 수재니스는 그 역할을 탁월하게 성취하고 있다―그것도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래서 이 책은 늘 ‘발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게 뭔지 1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치료제가 될 수 있다.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없는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새로운 시각에의 문’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꽉 막히고 답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해 주라. 그렇게 ‘좋은 연결’을 확장해 가라.
10.
개인적인 독후감의 마무리.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