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적어보자
얼마 전 학교. 일본인 유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수업에서 ‘버킷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버킷리스트를 적어보기> 글을 작성할 때 적은 버킷리스트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나눈 일본인 유학생은 아직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 만약 할 수 있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뭐가 있는지 물어보니 “세계 여행을 다녀보고 싶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세계 여행. 확실히 많은 사람이 가슴에 한 번은 품어보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꿈과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인 버킷리스트는 현실이 될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솔직히 우리 중에서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세계 여행을 꿈꾸면서 왜 세계 여행을 꿈꾸는지 생각해보는 사람도 별로 없다. 무작정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 우리는 꿈꾼다. 어쩌면 이 일은 우리가 너무나 현실에 지쳐가고 있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 세계 여행이 가장 많은 선택을 받는 이유는 현실을 떠나 내가 있을 곳을 찾는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내 자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불안에 떨면서 지낸다. 도대체 왜 사람은 이렇게 불안과 망설임을 가지는 걸까?
아마 그 일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연애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 해보아야 하는 일로 손꼽힌다. 연애하고 결혼까지 하면 좋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부모가 되어보아야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외에도 정말 꼭 한 번 해보라고 말하는 일이 많다.
연애. 분명히 살면서 한번 해보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눈이 멀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은 어제오늘 들은 말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서 연애를 하면 정말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그토록 꼭 한 번 해보라는 게 아닐까?
사실 연애 말고도 중요한 일은 많다. 연애를 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살면서 꼭 한 번 해보아야 할 일이 있다면 악기를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어느 악기라도 하나를 배워서 딱 두세 곡 정도만 연주할 수 있으면, 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평생 함께하는 취미를 얻기 때문이다.
사회의 잘못이다
나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쉬운 일은 ‘평생 가지고 갈 취미가 없다.’라고 말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먹고살기 바빠서 내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오늘 하루만 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쉬는 날에는 잠을 자면서 빈둥거린다.
숨 돌릴 틈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나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취미 생활을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내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겠으며, 어느 누가 한숨 돌릴 틈조차 없이 살고 싶어 하겠는가. 모든 건 개인이 아닌, 사회의 잘못이다.
예전에 본 <김제동의 톡투유>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A : 저는 20살 백수인데요, 제 고민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알바를 조금 하기는 했지만, 뭘 하고 싶은지는 아직 못 찾았거든요. 그래서 취직도 못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너는 취직은 안 하고 뭐하니? 어디 할 거니? 뭘 하거니?’ 하고 자꾸 물어볼 때마다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죄인처럼 고개 푹 숙이고 있는데, 왜 자꾸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놀고 있느냐고 그렇게 압박을 주니까 고민이에요.
김제동 : 죄인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A : 아무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저도 죄인 같다고 생각해요.
김제동 : A 씨 아무것도 안 해요? 일 안 하고 싶어요?
A : 하고는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김제동 : 그래요, 네. 뭘 해야 할지 모르면 안 되나?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일은 하고 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손 들어보세요.
청중들 : (우르르 손을 든다.)
김제동 : 네, 내려주세요. (손을 번쩍 들면서) “지금 톡투유 하고 있지만, 앞으로 톡투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청중들 : (웃음)
김제동 :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면, 사람이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입니까? 병원에 실려가서 아픈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인가? 비유가 심할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열 받아서 그래요. 아니, 저렇게 있으면 되지. 보면 좋죠? 그렇게 있으면 돼. 괜찮아.
하물며, 왜 남의 집 딸한테 ‘너 뭐하냐? 아무것도 안 하고 뭐하냐?’라고 하면 지금 대답하고 있지 않느냐고, 뭘 하려고 해도 자꾸 물어보니 할 시간이 없다. 뭘 하려면 뭘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던가! 화장실 가려는 사람을 두고, ‘너 어디 갈거니? 너 뭐 할 거니?’라고 자꾸 물어보면 화장실 못 가잖아.
제발 좀 젊은 친구들한테 취직 안 하느냐고 묻지 좀 마세요. 그건 저한테 ‘너 왜 그렇게 생겼니?’라고 묻는 것과 똑같아요.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요? 아, 그럴 거면 자기네들이 20대가 되면 취업이 재깍재깍 잘 되는 사회를 만들어 놓던가!
청중들 : (환호)
한 명의 청중과 대화를 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한 번 꼭 해보아야 할 일이 있지만, 우리는 모두 너무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할 수가 없다. 학교에 다닐 때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부만 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내 시간을 만들어서 내 삶의 여유를 즐길 수가 있을까? 혹여 취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주변에서는 ‘아이고, 팔자도 좋다. 아직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무슨 취미 생활이고?’ 같은 말로 또 한소리 듣게 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에 우리 한국 사회는 너무나 가난한 사회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한국 사회는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취미 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중 상당수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일이 없어서 하는 일이 많다. 매번 회사에 이끌려서 어떤 단체 회식 자리에 끌려다니고, 친구들이랑 만나서 화풀이를 하는 일이 전부다.
우리 사회를 먼저 산 사람들은 살면서 꼭 해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많지만, 내 시간을 갖는 것 자체를 우리는 쉽게 허락받지 못한다. 항상 앞에서는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걸 해봐. 그때 아니면 언제 하겠어?”라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도대체 뭘 배웠어?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했냐?”는 구박을 한다.
이게 현실이다.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 걸까? 그 시간에 한번 해볼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하지만, 막상 지나면 놀기만 하고 뭘 했느냐고 타박한다. 그러니 어찌 젊은 세대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으며, 평생 한 번을 해보아야 한다는 일에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가 있겠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장강명의 소설 『표백』을 읽어보면 이런 글이 있다.
“도전 정신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젊은이고 나이 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다 가져야지, 왜 청년들한테만 가지라고 하나요?”
“젊을 때는 잃을 게 없고, 뭘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여러 가지 기회를 다 노려봐야 한다는 얘기지. 그러다가 뭐가 되기라도 하면 대박이잖아.”
“오히려 오륙십 대의 나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인생 저물어 가는데 잃을 거 없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은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일례로 시간을 2, 3년만 잃어버리면 H그룹 같은 데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잖아요. 나이 제한을 넘겼다면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경험이 남겠지.”
“무슨 경험이 있든 간에 나이를 넘기면 H그룹 공채에 서류도 못 내잖아요.”
“얘가 원래 좀 삐딱해요.”
누군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니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멋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딱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JTBC <말하는 대로>에 출연한 표창원 의원은 젊은 세대를 향해 “건방져도 괜찮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건방지게 말하는 게 너무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안 좋은 낙인이 찍혀 제 삶을 살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소리일까?
꼭두각시가 되느니 광대가 되자
27살에 생일을 맞이한 나는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을 해본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많은 책을 만나고, 종종 간혹 가다 사람을 만나는 게 내 이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이 삶을 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세간의 잣대에 비춰보면 하잘 것 없는 일이고, ‘놀고 있네’라는 말을 듣기 딱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내 삶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나는 내 글을 읽으면서 내 삶 또한 옳다고 인정하고 싶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남의 꼭두각시로 살바에, 차라리 우스운 광대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살면서 한 번은 꼭 해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일들. 그 수많은 일 중에서 오직 하나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웃을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혼자서 ‘해냈다!’라고 웃을 수 있는 시간. 이것이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는 건 절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고 있고, 종종 멈춰서 ‘내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질문할 시간을 보낸다. 대학 공부를 반 정도 손을 놓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냥 공부하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오직 공부만 하는 것보다 책을 읽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주변의 단편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버킷리스트를 간단히 적어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적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때때로 건방져 보이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어딘가로 이동하지 않더라도 ‘출구’를 찾아내는 일은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창’이 있다. 내 경우에 그것은 책이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네모진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네모난 창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 실제로는 자기 집이나 거리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여기에 없는 어딘가에 ‘바깥’이 있고, 자유롭게 문을 열고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다.”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중에서
원문: 노지의 소박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