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출신의 노동운동가. 기륭전자 비정규직 해고 사태에 맞서 장기 농성 투쟁하며 합의를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투쟁 정신의 그녀
1986년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 87년에는 이 학교의 사학비리 척결, 사립학교 민주화투쟁 등을 주도하여 학생회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89년 학교를 졸업하고 청량리정신병원, 잡지 우리교육 등 몇 곳의 직장을 거쳐 92년 구로공단의 갑을전자에 입사한다. 여기에서는 어용노조 민주화추진위원회 대의원 및 조직부장 등을 역임하며 활동, 97년에는 노조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갑을은 IMF 외환위기가 터지며 주 채권은행인 우리은행에 의해 기업개선절차에 들어가게 되고, 두 차례의 워크아웃에도 불구하고 기업 정상화에 실패하여 2003년 상장 폐지 및 회사 정리절차를 밟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계열사인 갑을전자는 2000년에 파산이 결정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생계대책비 지급, 공장 재가동 및 매각시 고용승계 / 단협승계 / 노조승계 약속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2000년 11월 합의가 이뤄지며 마무리되나, 회사가 분할매각되어 그녀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모두 직장을 다시 구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전설이 된 기륭전자 파업에서 대선후보로
2002년에는 파견회사인 휴먼닷컴을 통해 기륭전자에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입사. 2005년 4월 문자로 해고를 통보하고 해고 사유로 ‘잡담’을 든 소위 ‘잡담해고’ 사건이 발생하는 등 파견직에 대한 차별과 인권 침해가 심각하다고 여긴 그녀는, 노조를 만들어 대응하겠다고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 같은 해 7월 사람들을 모으고 노조가입원서를 받게 된다.
같은 해 8월 관악지방노동사무소가 기륭전자 및 휴먼닷컴이 도급으로 위장하여 노동자를 불법파견했다고 인정하고 이에 대해 개선계획을 제출하도록 지시하자, 회사는 합법 도급으로의 전환을 위해 계약 만료 노동자들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하기 시작한다. 이에 노조는 파업에 돌입. 파업은 10월 경찰이 투입되며 해산되고, 김소연과 2명의 간부가 구속된다. 3개월 후 보석으로 출소한 김소연은 다시금 투쟁에 돌입,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옥상 농성, 단식 농성, 포크레인 고공농성 등을 이어갔다. 결국 2010년 11월 1일, 정규직화에 합의. 5년 4개월 만의 타결이었다.
기륭전자 투쟁을 이어가는 가운데에도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2008년에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를 결성했고, 같은 해에는 금속노조 비정규투쟁본부의 부본부장이 된다. 2009년에는 용산 사태, ILO 권고 이행 촉구 투쟁 등을 벌였고, 쌍용차 점거 파업에도 연대하였다.
기륭전자 투쟁이 마무리된 뒤 2011년에는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활동하였으며, 2012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네트워크,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 공동행동, 민주노총 비정규투쟁본부 등에서 집행위원을, 서울비정규노조연대회의에서 의장 등을 맡았다. 이후 ‘노동자후보’라는 이름으로 2012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선언. 진보신당은 김소연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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