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전남 완도 출생. 1972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72년에는 행정고시, 76년에는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했다. 이후 전자지방검찰청 /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서울보호관찰소장, 사법연수원 교수, 청소년보호위원회,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 2002년 검찰을 떠난 뒤에는 청소년 인권보호법률지원단 단장 및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를 역임.
커리어에서 사회 활동까지 완벽한 엄친아
사법고시 수석 합격 후 1978년부터 검사생활을 시작하면서 공안부, 특수부 등을 거친 엘리트 검사. 7형제 중 5명이 서울대 출신일 정도로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의 엘리트 교육,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고 알려져 있다. 부인은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 한 TV 프로그램에서 대놓고 ‘엘리트 부부’로 칭했을 정도.
그러나 그는 유능한 검사로서보다 다양한 사회 활동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청소년 관련 사업을 시작한 것을 자신의 ‘전환’으로 언급하는데, 1989년 청소년 교화 기관인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은 것이 그가 청소년 관련 사업에 뛰어든 계기로 알려져 있다.
1997년에는 국무총리 산하 청소년 보호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맡아 청소년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상시켰으며, 청소년 성매매범 신상 공개, 유흥업소 밀집지역 청소년 야간 통행 금지, 유해업소 과징금 부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공직을 떠난 후에도 청소년 인권보호법률지원단 단장을 맡는 등 청소년 문제에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변호사로서는, 2004년 성매매 여성들이 업주를 상대로 제기한 집단소송에서 피해 여성들을 무료 변론한 것이 유명. 성매매 피해 여성이나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을 위한 무료 변론을 이어갔으며,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 피해 여중생의 변론도 무료로 맡았다. 특히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의 변호사로 나섰던 것은 젊은 네티즌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기도. 청소년 문제에 대해 연구하며 자연히 여성 청소년 문제, 성매매 문제까지 전문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메니페스토 운동의 창시자, 대선후보로 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운동은 매니페스토 운동. 2006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매니페스토 운동’을 전개하며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던 매니페스토 개념의 전도사로 나섰다. 특히 SBS 및 중앙일보 등 언론사가 여기에 동참하고, 여러 언론에서 매니페스토 개념을 칼럼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다루면서, 당시 선거에서는 공약(空約) 문제와 매니페스토 지수 등이 선거 쟁점이 되기도 했다.
다양한 문화 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2004년에는 KBS 라디오 ‘안녕하세요, 강지원입니다’ 등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한국-이탈리아 수교 12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가곡과 민요를 부르는 등 성악가로도 데뷔(?).
청소년 문제 전문가로서, 한국의 엘리트 교육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한 방송 토론에서 폭력서클 가입을 강요받아 고민중인 남고생에게 ‘억지로 다닐 필요가 없다, 검정고시로 얼마든지 대학 들어갈 수 있다, 가담하지 말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조언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다양한 기고, 인터뷰, 강연을 통해 출세 지향적인 엘리트 교육의 문제점을 역설하고 재능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외에도 2008년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회 위원장, 2009년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2011년 국민추천포상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타고난적성찾기국민실천본부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무소속 후보로 나섰다.
3. 진보의 아이유에서 종북주의자까지, 이정희 인생 설명서
6. 시대의 엄친아 위너, 강지원 인생 설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