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축제’라는 건
전주대학교에서 축제를 했다. 오늘은 저녁 산책삼아 아내와 함께 전주 대학교까지 걸어가 봤다.
시간이 이미 저녁인지라 주요 행사들은 끝나 있었고 무대 한쪽에 마련된 천막들에서 여러 학과들이 술집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대에서는 전주대학교 학생들이 하나씩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노래들이 찬송가다. 찬송가 가요제 같은 건가 보다. 하지만 리듬 자체는 대개 발라드 가요와 별차이가 없다. 부슬비가 조금 내리지만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노천 극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노천 극장의 자리에 앉아서 그 노래들을 들었다. 그리고 이따금 우리들이 젊었을 때의 대학축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축제란게 뭘까? 대학시절 나는 단순히 축제는 그저 축제라고 생각했다. 즐길 뿐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다. 내가 축제가 뭔지 몰라도 축제의 본성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지금의 대학생들도 대부분 축제가 뭔지 생각을 안해 보겠지만 오늘날의 축제가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뭔가가 거기에 있거나 혹은 뭔가가 거기에 없어서 말이다.
지금와 생각해 보면 대학 축제란 일종의 허락된 파격의 시간이다. 다른 조직 생활도 그렇지만 학교 생활이라는게 정해진 일과만 따르면 단조롭고 뻔한 면이 있다. 그 단조롭고 뻔한 시스템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고정된 시스템은 모순과 답답함을 축적 시킨다. 그리고 이 긴장과 모순은 해소되어야 한다. 따라서 축제같은 특별한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축제 기간은 보통의 학교기간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때다. 보다 큰 자유가 있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못해본 것을 하려고 한다. 못 만나던 사람들을 만난다. 대학 축제만 이런게 아니라 명절이라던가 예전에 마을에서 굿을 한다던가 하는 것에도 다 어느 정도 이런 뜻이 있다.
모든 것이 항상 같으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생활을 어느 정도 통제된 파격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축제가 필요하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80년대에 평상시에 하지 못했던 것에는 바로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생각한 것을 자유로이 토론할 수 없고 책도 금지된 책이 있고 노래도 금지된 노래가 있었던 시대였다. 자유가 너무 없었다. 아니 사실 지금도 그랬던가?
이걸 좀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학문을 하는 대학이라는 곳과 대학 캠퍼스 바깥의 현실이 너무 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책에 있는 것과 현실이 너무 달랐다. 그 다름은 종종 권위주의에 의해서 억눌러졌다. 그러다보니 제약이 좀더 느슨해지는 대학축제는 사회와 대학간의 구별의 벽도 약간 낮아지게 만들고 이때는 사회가 좀 더 깊숙히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항상 이 문제가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대학생들은 축제가 즐거운 시간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것이 단순히 발산과 소비의 시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느꼈다. 적어도 어떤 학생들이 그것을 지적했을 때 그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연스레 대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결국 민주화 반독재운동이라는 한국적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게 분명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이 민족과 국가만 생각하고 노는 것, 낭만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취직걱정, 진학걱정을 안했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았다. 하지만 사회와 충돌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은 언제나 그 사회 현실에 눈을 돌리는 부분이었다.
자유는 억압되고 저항은 다시 충돌을 만들어 낸다. 어떤 대학들은 마치 데모가 축제의 주요목적인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 데모가 있을 것이 뻔해 보였으니까 그렇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유독 그런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쌍쌍파티를 하거나 가요제를 하고 천막주점을 한다고 대학당국과 긴장감이 도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의 대학 축제
지금은 어떨까? 지금의 대학에서 과연 대학생들이 대학의 사회적 책무같은 질문에 고민할까?
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전만큼 할 것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과거의 대학생들은 취직걱정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우리는 사회적 엘리트라는 엘리트 의식은 좀 더 높았다.
그러나 요즘의 대학생들은 취직걱정이 훨씬 크고 훨씬 더 풀이 죽어 있다. 사회나 민족에 대한 책임감 따위를 말하는 것은 오늘의 대학에서 왠지 낯설고 어색하다. 그들에게 엘리트로서의 자신감은 보기 드물다. 요즘 대학생들은 동아리활동도 취업활동의 준비생활쯤으로 생각한다고 일전에 들었다.
이것은 학생만 그런게 아니다.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대학안으로 들어온 것은 단순히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교수들의 엘리트의식과 자부심도 내가 보기엔 크게 줄었다. 오늘날 대학과 사회의 경계선은 무너졌다. 과거에는 담장안의 학문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깥 사회와 다른 것이 괴로웠다면 오늘날에는 캠퍼스 바깥이나 안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숨쉬기 어렵게 하는 것같다. 그나마 꿈꿀 수 있는 장소조차 사라졌달까?
꿈꾸지 못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기만하다는 것은 여러모로 잘하는 짓이 아니다. 사람은 라면을 먹고 있어도 자기 삶의 이유나 명분에 대해 자신이 있을 때 행복하고 스테이크를 먹고 있어도 그저 소비하는 존재, 더 먹기 위해 애쓰는 존재로만 자신을 파악한다면 행복하기 어려운 법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상과 비전이 없다는 것은 희망도 없다는 거라서 사람을 작게 만든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참 그렇게 되기 쉬울 것같다. 요즘 학생들은 축제를 준비하기가 전보다 더 어려울 것같다. 축제란 꿈꾸는 시간인데, 꿈꾸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현실이 코앞에 와 있다면 축제란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해진다.
꿈꾸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젊은이들을 그저 취업해서 돈이나 벌면 좋겠다는 생각밖에는 못하는 존재가 되게 한다. 비전의 부재는 우리 사회의 활력을 빼앗아 갈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이러면 경제에도 좋지 않다. ‘돈, 돈’ 하기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하는 기현상이 한국에서는 벌써 오래동안 계속되고 있다.
꿈이 보다 분명하다면 축제는 더 신이 날 것이다. 꼭 이상이라고 해서 민주화나 독재타도 같은 것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태운동이나 페미니즘이나 지역살리기 운동이나 제4의 산업혁명 같은 것을 진정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본다면 청년들은 그런 문제에 매진 할 것이다. 지방대를 나온 학생들도 굳이 낯선 먼 곳으로 가서 어떻게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안해도 될 것이다. 창업도 훨씬 진지하게 고려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꿈과 비전과 사상이 필요하다. 황당해도 그걸 하면 밥을 못먹고 살것같아도 그래도 그걸 하면 삶이 의미가 있을 것같고 심심하지 않을거같은 그런게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축제는 축제답기 어렵다. 나는 요즘 청년들이 안타깝다. 가슴 뛰는 청춘이 되기 어려울 것같아서다.
따지고 보면 가슴 뛰는 일이란 살아있다는 것의 핵심이다. 나이든 세대는 뜨거웠던 옛날에 대한 추억이라도 있다지만 요즘 청년들은 살아서 좀비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런 이상과 비전의 부재에 대한 책임의 상당부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옥수수죽을 먹고 당장 굶어 죽을 것같던 시대에 우리도 한번 쌀밥에 고깃국 먹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미래를 가져보자는 것은 그 나름의 비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반공이나 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이 미래에 대한 비전인 줄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것은 특히 신세대에게 비전이 못된다. 요즘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비전으로 우리 사회가 더 좋은 곳이 되려면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더욱 더 나아가야 할텐데, 더 높고 자유로운 꿈을 꿔야 할텐데 우리 사회의 주류 정치세력은 아직도 반공에 쌀밥에 고깃국 먹는 이야기를 붙들고 있다. 한국이 동남아를 이끌고 인류를 선도한다는 비전이 아니라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아파트 늘리고 자동차 바꾸는 꿈밖에는 이야기 못한다. 스마트폰도 늦게 도입하더니 전기차도 미적댄다. 뭐하나 앞으로 나가려는 것은 없고 4대강 공사같은 걸로 수십조씩이나 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무역상대가 공산당이 지배하고 6.25때 우리와 싸웠던 중국인데 아직도 빨갱이 잡으려고 눈을 부릅뜬 사람들이 참 많은 가 보다. 이게 다 사상을 억압하는 풍조다.
요즘 세상을 보면 사상과 가치는 무의미하며 탁상공론이고 오직 눈앞의 물질이 의미를 가진다는 정신적 패배주의가 만연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런 태도에는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이 조롱당하거나 빨갱이소리를 듣기도 할 수 있다는 현실과 연결고리가 달려 있다. 우리가 과연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좌절하는 일과 연결고리가 달려있다.
이 시대에 꼭 꿈의 공간이 대학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꿈의 공간은 어쩌면 제주도 같은 요즘 인기 좋은 지역일 수도 있고 어딘가에 있는 인터넷 사이트 일 수도 있으며 어떤 동호회같은 것일 수도 있다.
부분적으로는 폐쇄적인 경제자유지역을 인터넷에 만들 수는 없을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면 어떤가. 어떤 시나 마을이 꿈의 공간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어도 몇몇 사람의 가슴은 뛰게 만들 것이다. 우리의 시대를 다시 분석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면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바로 꿈의 공간이다.
이 모든 것이 홍길동같은 꿈일지도 모르지만 어디가 되었든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 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고작해야 이민 가는 것이 꿈인 시대가 아니라 말이다. 물론 대학도 좀 더 꿈을 쉽게 꿀 수 있는 곳이면 한다. 너무 일찍부터 현실적이되는 공간이 아니라 말이다.
대학은 대학이 너무 경제적인 것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망가진 면이 있다. 이상과 꿈이 아니라 돈과 취직에 대한 곳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학이 다시 꿈꾸기 좋은 곳이 되는 때, 그때가 바로 축제가 가장 축제다워지는 때일 것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