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준비는 불가능하다. 죽음을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그래서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체를 없애진 못한다. 하지만 죽음에 익숙해짐으로써 더 이상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순 있으며 이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죽음’에 대한 관심
여러 사회적 지표를 통해 다른 사회에 비해 유달리 경쟁과 스트레스가 심한 것으로 나타나는 한국 사회.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페이스북에서 여러 분야의 뉴스를 자주 공유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어, 이상하다. 이 뉴스가 왜 이렇게 많은 반응을 일으키지?’라고 뜻밖에 놀랐던 경우가 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수와 공유수가 가장 많았던 경우였다.
이들은 바로 ‘안락사(존엄사)‘ 관련 뉴스들이었다. 주로 안락사가 허락된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에서 노인 혹은 불치의 병에 걸린 젊은 인물이 존엄사를 선택하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었다. 자신이 죽는 날에 파티를 열고, 친구와 친척 등을 초대하고, 슬픔이나 애도 대신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에 마지막 인사를 한 후 평화롭게 준비된 임종을 맞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죽음에 대해 슬픔과 두려움 등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이 기사들을 보면서 ‘아, 죽음도 이렇게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구나! 두려워하고 슬퍼하기만 하는 게 아닐 수도 있구나!’는 느낌을 경험했고,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이 어느 정도 상쇄되면서 오는 일종의 안도감, 치유의 느낌 등이 있었던 것이라 짐작된다.
한국 사회에서의 ‘죽음’
그런데 불명예스러운 ‘자살률 1위’의 자리를 오랫동안 놓치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안락사에 대한 이러한 깊은 관심은 왠지 모를 착잡함을 느끼게 했다. 안락사에 대한 합리적이고 건강한 관심들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 느껴져서었지 싶다.
한국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의미는 다른 사회에서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평상시 죽음마저도 미처 고려치 못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피로 사회’ 혹은 ‘위험 사회’의 분위기랄까.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과 생존에의 위협은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에서마저도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고 있다. 개인들은 정부와 사회가 더 이상 자신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함을 실제 경험으로 인식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삶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식해 버린 셈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실제 죽음은 그 어느 사회보다도 높게 일어나고 있다. 앞서 말한 높은 자살률은 물론이고 역시 높은 수치를 기록하는 산업 재해에 의한 죽음도 해당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것들은 분명 죽음의 문제인데 동시에 삶의 문제가 되면서 살기에 급급한 우리들은 죽음을 잊은 듯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의식 수준에서의 일이며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는 결코 죽음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숨겨진 한국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안락사를 주제로 하는 기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분석해 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성찰할 기회
죽음에 대해 억압된 심리는 삶에 대해서도 왜곡된 심리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삶은 곧 죽음과 한 몸이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 대한 의식이 선명할수록 삶에 대한 의식도 더 선명해지며 죽음에 대한 의식이 옅을수록 삶에 대한 의식도 옅어진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살아도 제대로 살 수 없다고나 할까.
당장의 일과 생계와 경쟁에 쫓겨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지만 결국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그것을 하는지 모른 채 글자 그대로 불태우기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잊음으로써 삶이 더 나아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얼핏 보기엔 모순 같지만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존재하는 것’을 없는 것처럼 착각하거나 오해하면 당연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죽음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대면하고, 알아채는 과정 말이다. 과도하게 빡빡한 삶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죽음과의 만남’을, 그 당연한 우리의 권리를 다시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다루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 명의 유명인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다룬 <바이올렛 아워>는 아주 적절하며 필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두려움에 빠져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기는커녕 죽음에 눈길조차 주지 못한다. 죽음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다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죽음을 보아야 할까? 나는 이 책을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래서 완곡한 표현이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표현을 자제하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자세하고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실제보다 낭만적이고 근사하게 묘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약간의 거짓을 더해서라도 마지막 순간을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저 실제로 있던 현상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관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최대한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케이티 로이프, <바이올렛 아워>에서
죽음에 대한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세속적이고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비극적 관점, 죽음 후의 천국 등을 설정하는 종교적 관점, 불교 등에서 깨달음이나 열반 등으로 제시되는 초월적 관점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도 가능하다. 죽음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는 것이다. 과장되지도 그렇다고 축소시키지도 않고, 어떤 감동이나 감정을 불필요하게 강조하거나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이 유용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솔직성에 있다. 어떤 내용을 의도적으로 더 만들어 내거나 강조할 필요 없이 혹은 무시하거나 회피할 필요도 없이, 우리 중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솔직성은 때로 가장 강력한 파워를 지닌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점점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 이전처럼 집이 아니라 대부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 과정은 감추어지고, 죽음 이후도 현대식 장례에 의해 처리되면서 우리는 죽음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압박감이나 본능적 느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뉴욕 대학의 교수이자 작가, 저널리스트인 케이티 로이프는 이 사라져 가는 ‘죽음의 대면’을 직접 다루고자 책 <바이올렛 아워>를 썼다. 이미 작고한 다섯 명의 유명인이 그 죽음의 주인들이다.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 불렸던 수전 손택,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 존 업다이크, 30세에 요절한 영국의 전채 시인 딜런 토머스, 그림책의 피카소라 불리는 모리스 센닥이 그들이다.
이들의 전기들, 작품과 편지들 그리고 가족과 지인들과의 인터뷰 등 방대한 자료와 취재 활동을 통해 그들의 죽음과 그들이 죽음을 맞이했던 과정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인위적인 감동이나 특정 관점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인 케이티 로이프 본인도 어릴 적부터 병으로 인해 여러 차례 직접적인 죽음의 경험을 해 왔었는데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였다고 한다.
죽음의 두려움과 원만하게 지내다
사실 이 다섯 사람은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유명하겠지만 프로이트를 제외하곤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적게 알려진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죽음과 연관해서도 좀 더 깊고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특별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죽음은 동일하다. 다만 그들은 유명인이었기에 그만큼 좀 더 많은 자료와 증언이 있을 수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 그만큼 더 선명하게 ‘죽음에의 경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또한 죽음에 임하는 다양한 유형을 목격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저자가 선택한 다섯 사람은 각자의 개성과 특성에 따라 어떤 이는 가장 냉철하고 이성적으로(지크문트 프로이트), 어떤 이는 불굴의 의지로(수전 손택), 어떤 이는 글과 섹스로(존 업다이크), 어떤 이는 술과 자기 파괴로(딜런 토머스), 어떤 이는 기꺼운 맞이함으로(모리스 센닥) 죽음에 임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임하든 결국 죽음은 모두에게 똑같음을 목격하게 된다.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누구나 죽음과 동시에 이 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투쟁은 끝난다. 죽음과 동시에 투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다섯 유명인의 죽음을 조사하고 정리하면서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덜어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기를 그것은 “두려움을 떨쳐 낸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려움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일 뿐이다”라고 한다. ‘두려움과 원만하게 지내기’, 솔직히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멋지게 죽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그런 의혹은 확신으로 변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당신이 죽음을 직시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내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작업하는 동안 나 자신도 죽음에 대한 관찰이 이상하게도 불안감을 없애 준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삶은 아름다움으로 넘쳐흘렀고, 죽음의 문제를 다루려는 마음에도 좋은 기운이 더해졌다. 위대한 작가들의 죽음을 대하는 모습을 추적하며 어떤 이유로든 나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졌다.”
죽음으로 삶을 다시금 살다
병원과 장례식장이 아닌 상황에서 필자가 직접 접했던 죽음의 장면은 두 번이었다. 어린 시절 안방에서 맞이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임종이었다. 다행히 두 분 모두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셨었다. 당시엔 어려서 전체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하며 두 분의 임종 장면을 맞이했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그렇게 직접 죽음을 맞이했던 경험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삶의 진실 한 조각을 선명히 알려 주었다 생각된다.
그리고 함께 살았던 고양이들도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지하철에 버려졌던 유기 새끼 고양이 ‘해다’. 3개월 여를 직접 젖 먹이고 배설을 시켜서 키웠는데 그만 병으로 죽었었다. 그 후에 여러 마리의 반려 고양이들을 키웠고 나이가 되어 죽은 아이들이 있다. 모두 내 품에서 하늘나라로 떠났다.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의외로 죽음과 관련된 페친 분들의 포스팅이 자주 보인다. 죽음은 사실 바람과 비처럼 항상 우리와 함께 흘러가는 현상임을 느끼게 된다.
앞서도 말했지만 죽음에 대한 관점과 접근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이다 아니다 할 수 없이 각각이 고유한 의의를 지닌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든, 내세를 믿는 종교적 관점이든, 열반으로 죽음마저도 뛰어넘으려는 초월적 관점이든 모두 말이다.
그리고 책 <바이올렛 아워>가 전해 주는 ‘있는 그대로의 죽음’의 이야기도 우리에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좀처럼 죽음을 그대로 직면하는 일이 없는 우리들에게 그 경험을 시켜주면서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고, 삶의 결정들을 좀 더 현명하게 하게 해 준다. 삶을 다시금 살게 해 준다.
저자인 케이티 로이프의 다음의 마지막 문장이 이런 부분을 잘 표현해 주기에 여기 옮김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저자의 인터뷰이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제임스 솔터라는 작가가 저자에게 한 다음의 말을 인용하며 쓴 글이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알맞은 위안거리를 만들어 내는 거겠지요.”
내가 줄곧 찾아 헤맸지만 아직 이르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래,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위안거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으리라. 내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후회할 일을 덜 만들지 않겠는가.
자, 당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 있는가.
※ 책 제목 ‘바이올렛 아워(The Violet Hour)’는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바다로부터 어부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저녁 시간을 뜻하는 말로, 저자가 책에서 묘사하려는 미묘한 시간의 감정들―우울함, 막연함, 기대감, 괴로움―이 잘 녹아들어 있기에 선택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이 어둠으로 다 덮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깜깜한 어둠이 찾아올 것을 아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