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극적으로 학벌은 4차 산업혁명으로 무력화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혹은 망의 시대가 본격화 되면서 학벌이란 게 안 중요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20년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은 학벌따위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인가 하면, 꼭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요즘 학부형들이 좋은 대학에 아이를 보내겠다고 더 난리를 치는 것같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목소리가 전혀 터무니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학 무용론을 외치는 사람도 있으며 나는 그에 동조하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취직하는데 있어서 학벌은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학벌은 왜 더욱 강화되는 것 같을까? 이건 왜 그럴까?
학벌의 무력화
우선 4차 산업혁명의 결과 학벌이 무력화 된다는 것이 뭘까부터 점검해 보자. 그걸 위해 과거를 돌아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으로 미래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산업화가 진행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분명하다. 산업화라는 것이 일어난 결과 사회가 매우 복잡해져서 직업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도 조선시대와는 달리 여러가지 전문직업이 생겨났다. 이때 어떤 의미로 우리는 학벌파괴를 겪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학벌이란 유학을 얼마나 공부했는가 하는 학벌이다. 이제 조선시대에 공부하던 학문 같은 것은 직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무원을 뽑을 때도 사서 삼경 공부로 뽑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공자맹자만 공부하고 농사가 천하일의 근본이라면서 농사만 짓는 사람은 시대에 뒤진 사람이 되었다.
사회적 변화는 비기득권층에게도 기회를 준다. 다시 말해 유학천하였을 때는 유학을 잘아는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차지했지만 유학 문화가 끝장이 나자 적어도 잠시동안 교육의 공백이 온다. 사회는 변해가면서 여러가지 기능을 하는 사람을 요구하는데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별로 교육받지도 못한 사람이 그런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 한가지 예는 해방 직후 대학교의 교수자리다. 일제시대에 한국사람 중에는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해방이후에는 박사학위는 커녕 대학교도 안들어간 사람도 교수를 했다고 들었다. 서울대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하던 학생이 다른 대학에 가서는 강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서울대의 교육이 부실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등록만 하면 자격이 생기는 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상당히 오래동안 계속되었다. 내가 졸업한 포항공대는 1987년에 처음 학생을 받았는데 이때만 해도 우리 대학이 교수들이 전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다.
이걸 다시 순서대로 보자. 사회적인 변화와 요구가 있고 자리가 생기면 기존의 학벌은 무력화되고 새로운 사람들이 별 학벌 없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같은 자리를 놓고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걸 위해 학교가 생기고 학생들의 학벌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노하우를 축적했으며 사회가 지금 요구하는 직업을 위해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질적 변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회가 질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조선 사회는 현대 한국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도덕 철학이 기본 질서를 만들고 농업을 기본 산업으로 해서 유지되는 사회다. 그런데 사회가 질적으로 달라지자 유학에 달통했다는 것은 전보다 훨씬 의미없는 일이 되었다. 과거에 대한 반감때문에 공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우듯이 유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때도 실용서들을 썼고 수학과 과학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그 사고체계로는 현대의 학문들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학자들이 서양의 학문을 배워서 더 뛰어난 학자가 되고 새롭고 후학을 길러내는 식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과거가 통째로 떠내려가고 새로운 학교가 전혀 다른 철학에 기초하여 세워졌다.
4차산업혁명이 학벌을 무력화 시킨다는 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이란 결국 사회적인 복잡성을 크게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 없는 직업들이 훨씬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지식과 노하우가 필요한 새시대라고 해도 그걸 대학이 배워서 대학에서 새로운 세대를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 생각이 반드시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대학 시스템, 지금의 교육시스템이라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의 유학교육 시스템과 같은 운명에 있을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는데, 그 시스템을 만들어 낸 철학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은 새로운 시대의 시스템이 아니다
대학을 포함해서 지금의 교육시스템은 앤서니 티 크론먼이 학술연구적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주제를 다시 많은 소주제로 나누고 분리한 후 많은 사실을 수집하면 우리는 세상일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의 크기가 너무 커졌다. 이제 그것은 마치 당신이 여기서 뭐 하나 발언하려면 법률책 수십권을 외워서 온 후에 해야 한다고 하는 식으로 너무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적으로 빨리 자라고 있다. 지금 시대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학자가 많다. 그들은 모두 작은 주제를 잡아서 미친 듯이 지식을 늘린다. 그래서 200년전쯤에는 교양있는 지식인은 출판되는 책을 모두 읽었다던가 20세기 중반쯤에는 어떤 물리학자는 물리학저널에 나오는 논문을 모두 읽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당황스럽다.
사람들은 지식의 시스템 앞에서 날로 왜소해져만 갔다. 그리고 오늘날 대학에 입학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그렇게 왜소해진 교수들은 다시 더 왜소한 교육을 시킨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왜냐면 그게 바로 학술연구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 자세한 주석을 달고 인용을 달 수 없다면 당신의 말은 의미가 없다. 그것이 사람들을 점점 더 작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공부란 점점 더 현실문제를 푸는 것과 동떨어져 간다.
그러다보면 기성 교육시스템은 마치 시절 지난 유학교육 기관처럼 점점 더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도무지 그런 걸 배워서는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대학교육이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말에 언짢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말을 유학자들도 했을 것을 기억하라. 유학공부는 어떤 의미에서는 요즘에도 사는데 도움이 되는 공부다. 다만 직업을 구한다는 측면으로 보면 소용이 없다는 말을 들을 뿐이다. 지금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물론 어떤 관점에서 영원히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지는 것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학이 유학과 같은 말을 들을 날이 과연 오지 않는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학벌경쟁이 심화되는 이유
오늘날 학벌을 높이기 위한 경쟁이 오히려 더 높아보이는 이유는 학교 공부가 사회적 요구에 잘 대응해서가 아니다. 다만 과거의 질서는 무너져 가는데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서양학문을 가르칠 사람은 없는 가운데 사회적 활력이 떨어지는데 그러니 우리 유학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고 외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프랜차이즈 연구에 몰두하거나 택배서비스나 인터넷 상거래에 몰두하고 있다면 4년이란 시간을 들이고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대학에 다니는 것이 정말 설득력이 있을까? 거기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뭘 배우고 있으며 거기를 졸업하면 뭘 하게 되는가? 대기업 입사는 무슨 고시 합격처럼 어려워 보이는 가운데 대기업에서 일하는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세상은 너무 많이 바뀐다. 한국남자는 군대에 다녀오는 것까지 포함하면 대학에 다니는 기간만 6년 이상이 된다. 그런데 10년이면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것 같은 세상에서 6년동안 공부를 하면 그 공부는 다 헛것이 되기 쉽다. 하물며 초등학교 때부터 취직 생각하면서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공부해서 취직하겠다는 발상은 황당하다. 왜냐면 어릴 때 당신이 살던 세상과 20년 후의 세상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방법은 빨리 시작하는 것뿐이다. 배운 후에 출발하는 게 아니라 일찍 뭔가를 하면서 필요한 것을 배워가야 한다. 남의 답들을 죽 다 듣고 난 후에 자기의 질문을 찾아보는 게 아니라 아는 게 없어도 일찍부터 자기의 질문을 세우고 그것에 답하려고 하는 것이다.
과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해답
한국은 다양성을 죽여왔기 때문에 그걸 실감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한국이 죽던지 아니면 다양성을 막는 벽이 폭파되던지 둘중의 하나가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지금 조선시대에 과거 공부하던 선비들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 입사를 하겠다고 10몇년간 바보같은 공부를 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길 때가 올수 있다. 이미 온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얼마전에 이화여대는 큰 난리를 겪었고 지금도 그 여파가 가라않지 않고있다. 지금은 이화여대나 서울대 연고대의 학위를 얻는 것이 황금을 얻는 것 같겠지만, 10년쯤 지나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무슨 신학대학 학위를 받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 학위가 보일지도 모른다. 쓸데없이 취업용 공부한다고 자기를 스스로 바보 만든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다시 조선말엽으로 가보자. 그 때 계속 유학공부를 했던 사람은 분명 시대에 뒤진 사람이다. 그러나 유학공부 안하고 장터로 다닌다고 해서 갑자기 신학문을 배우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간단히 학벌을 포기할 수 없고 기성 시스템의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게 과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는 간단히 학교바깥으로 뛰어나갈 수 없다. 그러나 눈은 항상 바깥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기회를 잡을 수 있으면 잡아야 한다. 떠날 수 있으면 시스템의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엔지니어나 장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농사가 최고라고 하면서 자기 자리에 앉아있었던 조선시대나 일제시대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배는 이미 가라앉고 있다. 같은 노력을 해도 얻는 것은 훨씬 적다. 점점 더 위협이 목에 차오른다. 학벌이 점점 더 귀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학벌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다. 전보다 더 대단한 학벌을 자랑해야 같은 정도의 보상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결국 우리는 그 배를 떠나야 한다. 시스템을 떠났다면 학벌은 사소한 의미만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하는 것이다. 전쟁터졌는데 박사학위가 무슨 소용이겠으며 반대로 학교에서 내가 예전 계급이 대령이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세상이 뒤집어지면 학벌 따위 소용없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