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는 언제나 인문학의 대중화를 소리 높여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인문학 자체와 인문학의 대중화에 해를 끼친다. 최근 강신주의 인터뷰는 그의 사고방식과 노력이 인문학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인문학’에 가까운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강신주는 그 자신이 인문학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인문학의 이름으로 ‘인문학의 수준과 단계’를 재단한다. 하지만 지난 수백년의 인문학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견들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여왔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교만한 언설은 내뱉은 적 없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아주 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지식 소매상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과 학문이 자본주의에 포섭되었다며 나무란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지식 팔이’에 대한 성찰은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다. 성찰과 자기객관화가 완전히 생략한 이런 진단은 적어도 인문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50년 후면 자신만 남고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이들은 사라질 것이라 말한다. 그의 이 말은 50년은 커녕 5년만 지나도 영원히 잊혀져 버릴지 모르는, 아니 어쩌면 단 한 순간도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옛 사람의 말 한 마디, 고문서의 문장 한 줄, 고대 신전의 폐허에서 나온 토기편 한 조각에 열정을 다하는 인문학 탐구자들의 노력을 완전히 폄하하는 것이다. 인문학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욕하는 이가 말하는 인문학이 갖는 진정성은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인문학의 목적은 남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강신주는 스스로 22세기를 위한 고전을 남기겠다고 말한다. 고전은 애초부터 남겨지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시대의 탐구자들이 남겨 놓은 것들 가운데 아주 일부가 역사의 풍파를 이겨내고 우리시대의 기반으로 남은 것들이다. 애초부터 남겨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문학은 물론이고, 어떠한 종류의 학문도 될 수 없다.
그는 페미니즘을 수준이 낮다, 맹아적이다고 단언한다. 그의 선언은 대법한 것이기에 분명히 흥미로운 논점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선언은 강한 어조만 있을 뿐, 어쩐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하여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강한 어조 속에서 그가 갖고 있는 편견과 경멸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인문학 연구자를 자칭하는 이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은 무모함, 지적태만, 교만함, 그리고 비겁함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4중주”다. 그는 여성 사상가들 가운데, 오로지 한나 아렌트만이 자식의 책에서 다뤄진 것에 대하여 ‘이것이 우리 문명의 현주소’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문명의 현주소가 아니라 강신주 자신의 그릇이다. ‘파시즘’이라는 담론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강신주는 자신의 그릇에 겨우 아렌트만을 담을 수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그릇을 세상의 수준에 빗대어 말하는 그는, 모든 걸 떠나서 일단 비겁하다.
분명히 한국사회에서는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에게는 엘리트 의식과 계몽 의식이 습관처럼 베여있고, 사회 전반에 걸쳐서 사회문화적 불평등과 불균형이 실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뼈아픈 것이지만, 상당 부분 정당하다. 하지만 이 불신은 극복되어야 되어야 하는 것이지,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강신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을 파고든다. 그는 불신을 혐오로 강화시켜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마련한다. 결과적으로 강신주는 자기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문학자를 타자화시키는데, 이 불특정다수에 대한 타자화가 아주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는 ‘우리 이외는 다 이단’이라 선언하는 종교적 배타성과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다 종북’이라 매도하는 특정권력 집단의 정치적 선동을 이미 오래도록 경험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