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쯤 전의 9월 어느 날이었다. 성남 모처에서 아이템이 될 만한 결혼식이 열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전원 한국 여성들이었고, 이미 동거 중이었거나 아이들을 거느린 부부도 있었다.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다양한 국적이었지만 한국말들을 꽤 잘 했고 결혼식 후 피로연 때 맥주를 들이키면서 신부측 어르신들 앞에서 돌려 마실 줄도 아는, 거지반 한국 사람들이 다 된 이들이었다.
각 나라의 민속춤과 노래까지 곁들여진 행사를 마치고 행사 주관자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목사님이었다.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셨지만 자리를 좀 옮기자고 제안해 오셨다. 특별히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마고 하고 옮긴 자리, 그는 벽장 같은 곳에서 항아리 하나를 꺼내 왔다. 거기에는 낯선 외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항아리에 담긴 것은 그의 유골이었다.
“산재를 당해 죽었습니다. 보상금이 해결이 안돼 여기서 치료를 받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지요. 지금 오갈데 없이 제가 모시고 있는 분들만 해도 수십 명이 넘습니다.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항아리들을 눈과 손으로 훑으며 목사님의 목소리는 젖어들었다. 이름 하나 하나 읊을 때마다 무슨 숙달된 가이드처럼 고인의 국적과 나이, 일했던 곳, 사망 이유가 흘러나왔고 그 가운데 기계에 상처를 입은 뒤 불법 체류로 쫓겨날까봐 병원에 가지 못해 파상풍으로 사망한 이의 사연을 들으면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색적인 볼거리로 합동 결혼식을 취재 왔다가 뜻밖에 바윗돌처럼 무거운 사연들을 접하게 돼 당황했고 슬픈 항아리들은 맥락상 방송에 나가지 못했지만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을 위하는 기독교 성직자의 기본을 (요즘 한국 일부 개독교에는 전혀 없는) 지닌 목사의 인상과 이름은 깊이 남았다. 김해성 목사였다.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일부 기업주들의 횡포에 이렇게 분노했었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고 많은 사장님들이 교회에 갑니다. 사업 잘 대하기를 기도하고 헌금도 하고 눈물 흘리며 아멘을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들이 짓는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아예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 뒤 그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가끔 흘러들었다. 외국인들을 위한 병원도 세웠고 중국 동포 교회도 개척했으며 모교(한신대학교)를 대표하는 상도 받았다고 안다. 광주항쟁에서 스스로 도청으로 들어가 산화해 간 한신대생 류동운의 동기생으로서 그처럼 역사의 광풍에 맞서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TV를 보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하는 인터뷰도 들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면했던 그의 육성과 눈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이 목사님의 성추행 추문 보도를 들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진실게임으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직업병처럼 양쪽 주장을 듣고 그 신빙성의 퍼즐이 보다 완성에 가까워 보이는 쪽에 무게를 두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김 목사의 성추행 (에 가까운 행동)은 있었다고 보인다.
소변이 급해서 문 밖으로 뛰어나가다 보니 여신도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찔렀다’는 변명은, 내가 그를 만난 날 그 목사님의 젖어드는 목소리에 도저히 실릴 수도 없고 실려서도 안 될 것 같다. 한마디로 납득이 어려우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변명이다.
인간은 죄 지을 수 있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쉽사리 그릇된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죄를 숨기고 늬우치기를 거부한 순간 그 죄는 더욱 특별해진다. 다윗이 욕망의 포로가 돼 부하 장수를 죽음의 전장에 밀어 넣고도 입 싹 씻으려던 것처럼. 김해성 목사의 옛 말마따나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하면서 어찌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원문: 산하의 오역 페이스북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