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이 글은 이승한 칼럼니스트가 쓴, 비슷한 주제의 두 개 글을 병기하여 구성한 것입니다.
0. 이것은 단지 ‘내 생각’이다
바라건대 이 주제로 쓰는 마지막 글이 되었으면 한다. 딱히 답글에 대답할 생각도 없고. 동의 안 하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덤덤하게 agree to disagree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건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이야기이지, “내 생각이 옳고 당신의 생각은 그르다”라는 공격이 아니다.
1. 메갈리아4와 워마드
워마드에 대한 나의 짜증과 불호는 그들이 분파했을 때부터 시작됐으니 제법 오래 됐다. 다른 사회적 약자를 향한 연대모색이나, 한 약자의 자리에 또 다른 약자를 앉혀 교체함으로써 혐오의 정치를 계속 하는 시스템에 대한 성찰을 거의 의도적으로 그만 둔 공간이라 생각해서 그렇다.
그래서 옹호하는 이들이든 비판하는 이들이든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걸 우려했다. 같이 묶으면 모양새가 좀 이상해지거든. 옹호하는 이들은 메갈리아4나 메르스 갤러리 저장소 계정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비판하는 이들은 워마드를 염두에 두고 비판하는 평행선의 지속.
워마드에 대해서도 일부를 놓고 전체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들도 많지만, 애초에 게이들을 아우팅하겠다는 이야기로 다투다가 메갈리아에서 축출당한 이들이 카페를 개설할 때부터 워마드는 자정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2. ‘집단’이 아닌 ‘공간’이라고 일컫는 이유
내가 집단이란 표현 대신 공간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특정한 표현이나 사고방식, 의사소통은 그런 성향의 이용자들이 모여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의 성격이 그런 성향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굳어지면서도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커뮤니티로 예를 들어보자. 이를테면 드라마 <미생>을 즐겨보면서 야구도 좋아하는 이라면 DC인사이드 미생 갤러리와 야구 갤러리 모두를 들여다보겠지만, 그가 각각의 공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사뭇 다를 것이다. 각 갤러리에서 사용되고 공감을 사는 표현의 종류와 수위가 달라서 그렇다.
공간의 정체성은 처음 그 공간의 분위기를 잡아가는 파워유저들이 잡지만, 그 이후에는 그렇게 잡힌 공간의 정체성이 유저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결정한다. 내가 워마드의 유저들을 비판하는 것보단 그 공간의 의사소통 방식을 더 문제 삼는 건 그런 이유다.
혹자는 메갈리아4를 위시로 한 수많은 분파들의 유저 중 워마드를 같이 하는 이들도 있으니 그걸 구분해서 비판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집에서 난초를 키우며 그 사진을 식물갤에 올리는 사람이 알고보니 주식도 해서 주갤도 같이 다닌다고 해서 식물갤과 주갤의 성격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3. 악마화는 정당화를 부른다
일베 때부터 느꼈던 건데, 특정 집단 전체를 악마화하는 건 자칫 우리 안의 혐오를 “이건 상대적으로 별 것 아니잖아요!” 라고 변명할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알리바이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일베를 악마화하고 손가락질하는 행위를 하던 오늘의유머 일각에서 국민의당 분당과 4.13 총선 호남 몰표 이후 “호남이 불쌍해서 연대했는데 이제 안 되겠다”며 호남에 대한 시혜성 시선과 호남혐오를 분출했던 광경,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일삼는 일베를 비판하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이슬람 혐오와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을 외치던 광경을 보며, 난 이들이 “적어도 난 일베는 아니잖아”라는 말을 방패로 삼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 중 가장 낮은 사람보다 낫단 걸 기준으로 삼으면 그 이후엔 기준이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다. 더 높은 쪽으로 기준을 올리려면, 불편을 무릅쓰고 내 안의 편견과 싸우는 걸 택해야 한다.
4. ‘일베=워마드’는 문제적이다
일베와 워마드를 동급으로 놓는 것에 대해 이견의 소지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딱히 동의하진 않는다. 똥은 다 같은 똥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도 황금빛 똥부터 녹색의 설사똥까지 스펙트럼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워마드를 일베와 동급으로 놓고 축출하고 비판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그들을 비판하는 것만큼의 열의와 성실함으로 다른 혐오/비하 발언들과도 싸워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내가 늘 버튼이 눌리는 (장애를 열등한 것으로 규정해 비장애인을 장애인이라고 부름으로써 작동하는) 장애에 대한 비하에 대해선 해학과 비판의 자유를 들어 너무나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때로는 적극적인 변호까지 하던 이들이, 유독 워마드의 언어에 대해서만 비판의 수위를 올리는 건 보고 있기 스산하다.
(오해 마시라. 난 지금 워마드의 언어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같은 수위로 장애 비하 언어와도 싸워줬으면 했는데 그러지 않으니, 비장애 남성은 비하하는 언어로부터 수호되어야 하는 대상이고, 장애인은 그 대상이 아닌가 싶어서 하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장애 비하 발언을 하지 말아달라고 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던 분들이… 다행이라 해야 할지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일부 넷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장애를 비하하는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니 다들 장애는 비하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를 쌓고 계시더라. 왜 이제서야…
5. 극단주의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극단주의는 극단주의 자체에 대한 견제와 공격만으론 사그라들지 않는다고, 그 극단주의를 가능케 한 토양 자체를 바꾸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본다. 나는 워마드 식 언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되도록 내가 나의 자리에서 여성주의와 성평등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아울러 장애, 지역, 학력, 학벌, 젠더 다양성, 경제력, 종교, 국적, 지위에 대한 편견과 비하에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내가 모르는 것이 많으니 더 힘내어 공부할 생각이다. 더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즐거울 것 같다.
원문: 이승한 님의 페이스북
※ 편집자주: 이승한 칼럼니스트는 위의 글에서 “바라건대 이 주제로 쓰는 마지막 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결국 다시 비슷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되는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함께 감상하시죠.
비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에선 좌파든 우파든 막론하고, 다른 정파의 방법론이 마음에 안 들 때 해당 정파를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자신들이 더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는 걸 주요한 과제로 삼는다. 상대를 비난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대중의 당면한 욕망을 더 바람직한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네거티브 캠페인만으론 이길 수 없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범민주당계열 야당들이 거둔 두 번의 승리는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니라 믿을 만한, 혹은 새롭고 참신한 리더십을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이런 접근 방법은 심지어 일베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종종 적용되곤 한다. 일베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박탈감을 채워줄 만한 설득력 있는 삶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기존 정치세력의 책임을 묻는 입장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베에 부정적인 입장이고.
왜 워마드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가
요즘 나는 이런 방식의 접근법이 워마드를 바라보는 입장들엔 왜 잘 적용되지 않는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메갈리아 사이트는 옛날옛적에 망했고, 메갈리아4 페이지는 패드립은커녕 미러링 조롱조차 안한 지 오래 됐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워마드는 폐쇄적인 비공개 커뮤니티고, 그나마도 카카오 측에서는 검토 끝에 워마드를 강제 폐쇄할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도 많은 이가 반대하는 메갈리아는 사실 명확한 실체가 없다. 워마드 정도가 실체의 전부인데, 그조차도 머릿수로 셈하면 일베 회원들의 머릿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만 보면 마치 이들이 망국의 주역처럼 취급받는 분위기다.
아마 그렇게 부풀려진 공포는, 직접적으로 메갈리아나 워마드 활동을 하지는 않으나 그에 동조하거나 옹호하는 이들의 머릿수까지 다 셈해서 나온 것이리라. 그런데 그 머릿수가 많다는 게 무엇을 뜻하냐면, 자신이 여성으로서 느끼는 부당함과 공포와 차별과 위협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소를 제공하는 게 바로 메갈리아의 언어였고 워마드의 언어였다는 걸 뜻한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많지 않으니, 지금 이 순간 가장 손 뻗으면 닿기 쉬운 공급처인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언어로 그 수요가 집중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만 메갈리아는 반대한다’는 말
나는 “페미니즘은 괜찮지만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잘못 됐다”라고 말하고 싶은 이들이 왜 메갈리아와 워마드 때리기에만 집중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조류에 힘을 보태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가가 영 이상하다. 물론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욕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이 페미니즘은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닌 이들조차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한 비판에만 집중하는 건 아무리 고쳐 생각해봐도 희한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효과적으로 워마드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건, 한국여성민우회 같은 보다 온건한 형식의 운동주체에게 후원금 폭탄을 떠안겨서 그들의 방식이 압도적 주류가 되도록 만들어 워마드식 언어에 집중된 수요를 가지고 오는 거다. (물론 여성민우회의 방식조차 불온하다고 생각하거나, 여성민우회가 메갈리아나 워마드에 대한 과도한 비판에 반대하며 연대하는 입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우회도 똑같은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내가 드릴 말씀은 없다.)
물론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언어는 운동/유희의 성격을 모두 띈 형태이고, 후자의 유희성이 주는 해방감과 쾌감이 지니는 막대한 힘, 섹시함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보다 더 설득력 있고 불필요한 갈등 없이 상대를 설득하기 좋은 프레임이 존재하는데, 굳이 논쟁적인 프레임을 고집할 사람들은 많지 않다. 코어유저라면 몰라도,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을 이해하고 힘을 보태 줄 언어를 찾는 수요의 상당수는 더 효율적인 프레임으로 갈아탈 것이다.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조용히 학습모임과 굿즈 판매 등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프레임 확산을 꾀하고도 있고.
차라리 당신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라
그래서 난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언어에 반대하는 이들일 수록 더 열심히 자신이 고민하고 학습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때리기만 해선 오히려 그 핍박이 순교로 여겨지며 내부적으로 더 도그마적인 집단이 된다니깐. 통합진보당 사태 때 NL을 코너로 몰아봐야 왜곡된 지지와 충성도만 는다며 사상의 시장에서 알아서 도태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던 분들이, 왜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해선 초전박살박멸의 입장들이신 건지.
출처: 이승한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