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가 일어나는 때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폭로가 터진다. 데이트 폭력, 단체 채팅방에서의 성희롱, 임금체불 등. 모종의 폭로가 터질 때마다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바로, ‘공론화’다. 이를테면, 폭로라는 지점을 선택하는 이유는 대개 은폐되어 있는 어떤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 탓인지, 뭔가를 공공에 폭로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공론화’라고 여겨지는 착시효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폭로가 곧 공론화라는 등식은 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론화’라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 및 해결의 ‘단위’를 만드는 일이다. 개인이 사적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단위를 만드는 것이 공론화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적 영역에 혹은 은폐된 영역에 고여있던 문제를 ‘공론장’에 던지는 행위를 ‘공론화’라고 한다. 때문에 ‘공론’이 가능하려면 우선 ‘공론장’이 존재해야 하고, 없는 경우에는 그것을 만들라는 요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특정 개인의 힘으로는 아예 공론장 자체를 만들 수가 없는 케이스도 존재할 수 있다. 대개는 제도의 구멍 때문에 법률로도 해결이 불가하거나,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사람들이 문제를 쉬쉬하려 하거나, 권력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 그럴 것이다. 그럴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폭로’다. 즉, 폭로는 그 자체로 공론화인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의 공론화를 위해서 여론의 힘이 필요한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가령, 과거 노회찬 의원의 삼성 떡검 폭로처럼.
폭로 이후의 어떤 모습들
그런데 가장 최근의 그 ‘폭로를 주 목적으로 하는 SNS계정’인 강남패치니 한남패치니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억에 근 몇 년간 있었던 개인 실명공개를 포함한 폭로 중 그것이 제대로 된 공론화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인터넷에서 나쁜놈이라고 지목된 자에게 다수의 사람들이 몰려가 욕 한 마디씩 보태고 지나갈 뿐이었다.
모종의 폭로를 통해 개인의 능력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던 사안에 대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맞는 징벌과 문제해결 및 사태 개선, 재발방지 프로세스 마련으로 이어진 적이 몇 건이나 있던가? 그런 케이스가 존재하긴 했던가? 다수의 사람들이 그저 누구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또 누구는 증거 중심주의를 대충 동원해서 사실로서의 정보값이 불분명한 서술에 대해 각장의 정의로 판관을 자처하며 가해 지목인에게 사과문 제출이나 요구하는 건 ‘공론’이 아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안이 폭로되어 여론의 압력이 행사된 뒤에 ‘공론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터넷에서 불특정 다수의 아무 말과 떼비난만 난무하다가 결국 사인(私人)들끼리 변호사를 선임하여 문제를 ‘법원’으로 들고 가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공론화의 목적’을 이유로 촉발된 행위가 아이러니하게 사인들간의 다툼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의 반복인 이 어디에 공적 순기능이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
폭로를 고민하는 사람을 주변에 두고 있는 경우, 혹은 이미 폭로를 행한 사람의 주변인들의 경우,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연대는 폭로자가 들고 갈 데 없었던 ‘공론의 장’을 뒤늦게 나마 만들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공론을 통해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이 다시 동작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기명 폭로라는 것은 그 내용이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되레 공론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대중에게 해당 문제를 스캔들로서만 소비되게 만들 위험성이 상당히 높다. 때문에 마비된 공론의 기능이 작동하도록 힘을 쓰는 것이 문제제기자에 대한 유효한 연대이지, 사안을 스캔들 정도로 소비하고 있는 대중과 비슷한 스탠스에 서서 가해지목인을 질타하다가 결국 문제 해결 자체는 개인 차원으로 넘어가도록 방기하는 것을 과연 연대라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 폭로 이후 여론의 압력이 행사된 뒤에라도 앞서 적은 것들을 공론해 볼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시도라도 있어야 하고, 그런 요구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방의 서사만 담긴 진술을 근거로 가해지목인을 악마화해 매장하는데서만 그치는 여론몰이는 공론이 아니다.
폭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것을 공론의 영역으로 예민하게 다루려 하지도 않으면서, 매번 공론의 탈을 씌워 본인들의 무책임을 정당화하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는 것이다. 폭로는 그 자체로 (작동이 용의하지 않았을) 시스템에서 일탈하는 개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인데, 폭로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까지도 어느정도 선의 시스템을 갖추지 않게 되면, 결과적으로 피해호소인도 고립되고 가해지목인에게도 적절한 수준의 징벌을 내릴 수 없다.
우리에게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가 문제의 그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여학생들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한 학생들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정보는 해당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성과 입학년도, 단과대학을 총학생회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로 의결되었다고 한다. 이는 결국 시스템에 의한 징계 및 재발방지 프로세스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가해자의 신상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징벌하는 것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여론의 입 속’에 밀어넣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불법이다.
우리는 인민재판장이 아니라 공론장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보다 온당한 공동체적 합의와 보다 정교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 분개의 불구덩이로 ‘문제적 존재’ 자체를 태우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위’가 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당장의 정의구현이라는 이름의 린치처럼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신, 매우 느리고 지난한 일이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