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오를 떠나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런 점에서 8월 10일 시사인 천관율 기자가 수행한 인터뷰는 먼저 그 길이에서 눈여겨볼만한 자료에 속한다.
물론 이 인터뷰의 포인트는 나를 포함해 많은 애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시사인 천관율 기자가 설정한 명확한 주제, 즉 김종인이 상정하는 ‘정치세력의 통치 모델’이 어떤 것인지에 맞춰져 있다(첫 질문은 “야당에 없던 리더 유형이다”로 시작하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리더로서의 김종인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 나온다). 그러나 김종인의 답변이 워낙 단답식이라서 독자들이 포인트를 잡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천관율 기자는 중간과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사실상 “이 프레임으로 보세요”라는 의도가 분명히 들어간 긴 논평을 집어넣었다(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인터뷰라기보다는 인터뷰의 형식을 빌린 정치평론에 더 가깝다).
페이스북으로 보기에 좀 긴만큼 내 멋대로 요약하자면, 이 글은 김종인 대 “야권 주류”를 “선지자”형 독재 대 “시민 참여 노선” 간의 갈등으로 파악한다. 전자는 좋은 실적을 내긴 했지만 약점이 뚜렷하기에 더민주는 후자로 가야하지만(천관율 기자는 암묵적으로나마 이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도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점에서 50% 이상을 끌어당길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좀 더 단순하게 정리해보면 천관율 기자의 프레임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①정당지배구조에서의 독재와 민주(지지자 참여) 모델, ②기존 지지층의 지지확보와 보수층(“다수 국민”) 공략. 김종인은 이 사분면에서 독재+보수층 공략으로 분류되고, 더민주의 새로운 과제는 민주+’다수 국민’의 확보다.
SNS 상의 여러 필자들이 동의할 이러한 프레임에 나는 한 가지 불만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 프레임에서 독재 대 민주라는 구도에서는 제대로 다뤄질 수 없는 ‘정당의 역량’이란 문제가 누락된다는 사실이다. 이 인터뷰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선진국에서는 리더가 아닌 “정당 역량”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김종인은 “선진국은 정당 자체가 그런 기량을 축적하도록 꾸준히 노력해왔”으니 그게 가능하지만 “한국 정당은 아직 그런 수준에 모자라서 결국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답변한다.
이 답변은 천관율 기자의 프레임 속에서 단지 독재적 리더의 인식을 구성하는 한 요소 정도로만 읽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설령 김종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지적은 한번쯤 곱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김종인이 이렇게 쉽게 당내 의사결정구조를 휘어잡고 ‘독재적 리더십’을 큰 제약없이 실천할 수 있었던 ‘이전의 민주당’은 도대체 어떤 곳이었는지를 먼저 질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그래서 분명 편향되었을 경험에서 말하자면, 나는 정책정당으로서의 민주당의 역량이 그다지 높게 평가할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도 지나가듯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고등교육 정책문제에 관하여 민주당 모 의원실과 여러 차례 접촉한 적이 있다(민주당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때 이 주제에 그 정도의 관심을 보여준 곳이 거기 뿐이었다). 접촉과정에서 나는 평소에 궁금하던 다음과 같은 질문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민주당에는 10년, 20년 단위 계획을 설정해보는 의원실이나 기구가 있나?”
“민주당에서는 정당이 집중하는 분야에 관한 전문가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곳이 있나?”
“민주당에서 싱크탱크 역할을 해야 할 민주정책연구원은 각 의원실이 정책형성과정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생산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 “민주당은 정책형성과정에서 전문화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는가“로 집약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내가 들은 답변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이에 수반하는 흐름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사실상 개별 의원실의 역량에 의존하고 있다.
민주당은 전문가 집단을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정책결정과정에서 의존할 전문가 인력풀 자체가 개별 의원실의 관심과 보좌진의 개인적인 인맥에 의존한다.
1년 예산이 77억에 달하는 민주정책연구원의 싱크탱크로서의 기능은 심지어 당 내 의원실에서조차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어떤 사회로 만들어 갈 것인지 10년, 20년 단위로 고민하고 비전·로드맵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이것이 정치인의 역할이 아니라고 지적할 순 있겠으나, 특히나 오늘날과 같이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면 적어도 남이 그려놓은 그림이라도 가져와서 보여주는 게 중진급 정치인의 역할 아닌가?).
3.
개별 의원실과의 문답에 근거해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건 분명 너무 성급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는 매우 놀랍게 다가왔던 사례 하나를 추가로 소개하겠다.
2015년 여름, 당시 민주당 내에 어떤 행사가 있었고 그 자리에 문재인 당시 당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대학원생 문제에 관련해서 문재인 대표에게 질의할 문항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나는 나름 고심해서 몇 가지 질문을 작성해 보냈다. 유감스럽게도 당일 행사 일정상 문재인 당 대표가 해당 내용을 듣고 답변하는 일은 없었고, 애초에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나도 그냥 흘려보냈다.
여기까지는 언제 어디서든 한번쯤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진짜로 놀라운 일은 얼마 뒤에 벌어졌다. 내게 질문을 요청한 분께서 자료 하나를 보내주셨는데,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고등교육/연구에 관해 민주당 모 의원실에서 서면으로 질의하고 답변을 받은 내용이었다. 내가 놀란 까닭은 총리후보의 별 성의없는 답변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질문지의 상당부분이 내가 문재인 당 대표에게 보낼 질문으로 작성했던 내용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가 분명 한국의 대학원생 문제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나의 전문성이 곧바로 국정운영을 논하는 자리에 투입될 수 있을만큼은 아니라는 정도의 자기객관성은 갖추고 있다. 간단히 말해 해당 의원실에서는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와 장기전략”에 관해 국무총리후보의 의견을 묻는 질문지를 작성함에 있어서 나 정도의 어딜 가나 발에 채이는 수준 이상의 ‘전문가’와 연결될 루트가 없었던 거다(지금은 교문위에 박경미 의원실이 있으니 사정이 좀 더 나아졌으리라 기대한다).
이 케이스에서 내가 다시 한 번 더불어민주당 내에 정책결정과정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적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서 크게 비난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가 비주류가 대거 탈퇴한 민주당의 의사결정권을 장악했을 때, 잔존했던 ‘야권 주류’는 그에 맞설만한 장기적 비전과 효율적인 정책형성능력, 제도적 인프라 구축을 위한 청사진을 갖추고 있었는가? 지금까지 김종인이 민주당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주 원인으로는 (문재인 전 대표의 암묵적인 지지와 함께) 대체로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당 내 리더십 및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력의 부재가 지목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민주당 및 당내 주요세력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가 또한 한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 퀄리티의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시스템을 고안할 역량을 가졌는가의 문제다.
민주당의 주류는 그런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사람들은 기존 민주당정치인들의 무능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며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내세운 김종인을 신뢰했다. 즉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기존의 민주당 주류가 아닌 김종인을 지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전자의 정치적 역량이 부재했기 때문이며, 그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민주당을 강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정당으로 만들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선 후 4개월이 넘게 지난 현 시점에서 살펴보면 이 문제는 거의 개선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비례대표후보결정과정은 심지어 수도권에 거주하는 잠재적 지지자들조차도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당을 선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청년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잡음과 황당할 정도의 뒷처리는 이 정당에서 “10년 뒤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정책능력이 중요하다”고 외친 김종인은 실제로 당의 인프라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 같지는 않으며, 이후의 당 대표 경선과정 또한 친문/반문 프레임 이상의 의제가 유통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형” 리더십이 지속되든 시민 참여형 리더십이 끌고 가든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이 자연스럽게 제도개선을 촉진한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있다면, 나는 그 속도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만큼 느릴 수도 있다고 답하고 싶다.
물론 민주당의 많은 (비판적) 지지자들은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 또한 이러한 입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선거의 승리는, 그리고 이후의 지지율 확보는 단지 대표자를 추대하고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것으로만 얻어지지는 않는다.
정당은 한편으로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와 국민의 공공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집단으로써 더 나은 정책형성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누가 대표직을 맡는가라는 측면이 아니라 누가 대표를 맡든 최상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시도에서부터 가능하다.
5.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누가 민주당의 대표직을 잡든 다음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당직자들이 잠시 월급받으면서 쉬어가는 곳 정도로 간주되는 민주정책연구원의 연구능력을 정상화하는 것. 선거용 여론조사 기구 수준을 넘어 정책결정과정에 실제로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생산하고 당이 만들어나갈 미래 전략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 요컨대 누가 당권을 잡든 참고할 수 있는 공적 전략본부를 구축하는 것.
2) 민주정책연구원이든 아니든,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각각의 정책결정과정을 수행하는 의원실이 요청만 하면 해당 영역에 걸맞는 전문가들을 바로 섭외하고 의견을 묻는 일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것. 전문가의 섭외를 개별 의원실의 인맥에만 의존하도록 하지 않는 것.
3) 이를 바탕으로 특히 초선 의원의 정책결정능력을 극대화하며, 직업적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젊은 당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교육/지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물론 나는 그저 한 명의 아마추어일 뿐이며 나의 모든 제안이 가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시스템 구축의 노력을 결여한 채 단지 “시민 참여형 리더십”의 전환만을 외칠 경우, 우리는 10년 뒤에도 똑같이 “한국 정당은 아직 그런 수준에 모자라서 결국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김종인의 답변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년의 한국 정치가 입증했듯이, 유권자들은 당 내 의사결정의 민주주의보다 그 당이 얼마나 유능한 당인지를 먼저 묻는다(정확히 그것이 ‘유능하게 보였던’ 김종인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민주적 제도가 스스로의 유능함을 입증하기 위해선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 참고: 관심있는 모두가 익히 아는 문제겠지만, 정당 싱크탱크 문제에 관한 최근의 기사로는 다음의 한경 기사 또한 참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