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절대선, 인간은 절대악?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 작품 ‘원령공주’에는 20년이 흐른 2016년의 시선으로도 감탄을 금치 못할 장면들이 거듭 등장한다. 여성이 노동자로 활약하며 당당히 발화하고 심지어 맨스플레인의 전형인 ‘노동에 대한 조언’까지 발언한다. 문둥병 환자들 역시 사회의 타자가 아니라 주체로써 노동에 참여하고 복지의 혜택을 받는 모습은 고대사회가 배경인 작품에서나 현대사회에 비춰봐서나 경이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원령공주’가 자연을 보호하자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이전 작품에서 생긴 편견이 크다. 실제로 동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에서 인간사회와 기술의 발달은 절대악으로 묘사된다. 인간사회와 기술의 발전이 자연을 파괴해온 업보는 고스란히 대재앙과 멸망으로 돌아온다. 작중 자연을 대표하는 ‘오무’가 징벌자이자 절대선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대표하는 주인공 ‘나우시카’는 자신을 희생해 용서와 화해를 요청하며 ‘오무’에게 구원받는다.
자연에게 죄를 지은 인간이 희생으로 용서받고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뼈아픈 비판과 지적들을 수용하며 만들어진 코믹스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세계를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는 구도를 스스로 해체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선 ‘오무’조차 사실은 인간의 기술을 통해 창조된 인공생명으로써 인간이 구상한 유토피아를 조성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비판과 발전들을 거쳐 만들어진 ‘원령공주’가 단순히 자연을 절대선으로, 인간과 기술을 절대악으로 묘사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이치다.
분명 작중에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하며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성평등이 이루어진 사회, 여성과 병자 역시 노동할 수 있으며 존중받는 공동체의 건설이다. 자연을 대표하는 멧돼지신들은 나무를 베고 영토를 침범한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그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약자들이기도 하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는 구도 속에서 영화는 인간을 대표하지 못하는 ‘이시타카'(그는 전쟁에서 패배해 쇠락해가는 일족의 왕자일 뿐 타타리마을과도, 왕의 군대와도 관계가 없다)와 자연을 대표하지 못하는 늑대의 딸 ‘산'(그녀는 고아로 늑대신이 거둔 수양딸이다)이 끝내 함께 살아가자는 것으로 끝난다. 자연과 인간의 갑작스런 화해란 결국 불가능한 것이며, 수없이 모순적인 관계와 상황 속에서 그래도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숲에서 사는 것이 대안인가
최근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온 인터뷰(서울을 떠나 숲에서 전기, 가스, 수도 없이 맨몸으로 사는 부부를 만났다)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계기로,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 삶을 영위중인 가족의 인터뷰이다. 나무를 떼서 밥을 짓고 옷도 직접 지어 입으며 과탄산소다로 빨래를 하는 삶을 통해 환경친화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늘 ‘대안’ 혹은 ‘해결책’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기사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모습에서 늘 극단으로 치닫는 환경운동의 이면을 본다. 도시의 삶이란 환경을 파괴하며 인간의 본성이 억압받는 방식이기에 자연으로 돌아가 낭비를 줄이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공허한가. 이런 방식의 삶은 모순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밀집되어 살고 있기에 가능하다. 단 만 명만 이런 방식을 택해도 임야가 사라지고 개울과 하천이 오폐수로 오염되는 것은 금방이다. 결국 이런 삶의 방식은 대안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에 살고 있기에 얻을 수 있는 특혜에 가깝다.
사회의 발전, 도시의 발전, 기술의 발전은 만 명만 모여도 자연이 파괴되고 전염병이 돌며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든 공간을 수천만 명이 모여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바꾸어놓았다. 그 공간은 어찌되었던 인간다운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조절하기 위해 치열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공간이다. 문화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말이다. ‘원령공주’에서 보인 것처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연을 개척하고 터를 만든 사회에서 여성도 병자도 노동자이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종종 환상을 품는 농어촌공동체란 작은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공간이며 혐오와 편견, 그리고 차별이 종종 강화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운동,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논리는 종종 기술 전반에 대한 부정으로 치닫는다. 너무나도 쉽게 21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방접종 거부운동이 그렇다. 실제로 해당 인터뷰의 당사자도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의 글을 지지하며 자식의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인류가 과학과 기술로 오랜 시간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가치들은 결코 작지 않다. 집단위생, 면역, 설비와 같은 것들은 단순히 인간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당신이 10살이 될 때까지 살아있는 게 당연한 것, 주변 사람들 절반이 철마다 돌아오는 전염병에 쓸려나가지 않는 것, 성별/나이/장애의 차별 없이 사회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 혹은 인정받는 것이 옳다는 방향성들, ‘인간다운 삶’을 지칭하는 모든 것들에 기술이 처연히 녹아들어있다. 당장 세탁기의 발명이 획기적으로 가사노동시간을 줄였고, 가사노동에 얽매여 다른 가능성을 꿈꿀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에게 ‘시간’이 생겨나 훨씬 큰 발걸음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는가?
비뚤어진 기술혐오를 멈춰라
자연보호를 위한 해답은 비뚤어진 기술혐오가 아니다. 아쉽게도 자연을 완벽히 보호하며 인간적인 삶 역시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환상이다. 인간과 기술을 혐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 그 자체가 자연을 파괴하는 일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결국 답은 ‘이시타카’와 ‘산’이 함께하자고 말한 것처럼 끝없이 나아지는 내일을 위해 작은 변화 하나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금 더 환경친화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도시 속 재생산 공정을 도출하며 하나하나 타협점을 찾아나가기 위한 노력들이 바로 그것이다. 도리어 기술에 대한 부정은 너무나도 쉽게 인간적인 삶에 대한 부정, 그리고 인류의 역사동안 쟁취해낸 가치들의 몰락, 심지어 자연에 대한 파괴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늘 고민하고 또한 반성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