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아이유에서 종북주의자 논란, 그리고 토론회 일점사까지. 2012년 가장 큰 부침을 겪은 정치인 중 한 명.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진보 커리어
1969년 서울에서 출생. 1987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 1990년에는 서울대 총여학생회장으로 활약. 1996년 사법시험 합격, 2000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민변 사무처장과 여성복지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
매향리 미공군폭격연습장 소음피해 손해배상청구사건, 평택 미공군기지 소음피해 손해배상청구사건 등에서 승소를 이끄는 등 미군 관련 범죄 및 환경오염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2000년부터 준비가 시작된 호주제 위헌 소송에 준비팀으로 참여하여 2005년 헌법 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내는 등 여성 인권과 관련해서도 족적을 남겼다.
시국 사건에 대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2005년에는 이장형 강희철 조작간첩사건의 재심을 청구, 반공법 위반(간첩) 혐의로 기소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전두환 정권 당시의 판결을 깨고 무죄 선고를 이끌어냈다. 또한 2008년에는 사진작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완전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가 받은 최초의 무죄 판결로 알려져 있다.
2007년 3월에는 민주노동당에 입당,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한다. 원내 부대표와 정책위의장을 지냈으며, 2010년에는 민주노동당 대표직을 맡았다. 2012년 민주노동당 – 진보신당 탈당파 – 국민참여당의 3당 합당으로 통합진보당이 창당되면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되었다.
18대 국회에서 ‘진보의 아이유’로 불리며 종횡무진 활약한 그녀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서울의 2009년 설문조사에서 ‘돋보인 의정활동을 한 의원 1위’ ‘돋보인 의정활동을 한 여성 의원 1위’ ‘함께 일하고 싶은 국회의원 2위’를 기록하는 등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12년 통합진보당이 창당되며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통해 서울 관악을의 야권연대 후보가 되었으나, 단일화 과정에서 캠프가 여론조사 조작을 유도하는 문자를 대량 발송한 사건으로 인해 사퇴. 이 지역은 같은 당의 이상규가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당선된다. 다만 당시 통합진보당은 13석을 확보하면서 야권연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수혜자로 떠올랐고, 이정희는 국회의원이 되지는 못했으나 강력한 원내 3당의 공동대표로서 입지를 다졌다.
유례없는 부정경선과 종북 논란, 대선 제3 후보로 나서다.
그러나 같은 해, 총선 비례대표 부정경선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정희의 정계에서의 입지는 급속도로 쪼그라든다. 당내 진상조사위원회는 총체적인 부정이 있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는 이정희를 중심으로 한 당권파와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 등을 중심으로 한 비당권파 사이의 극한 대립을 불러왔다. 관악을 여론조사 조작 유도 사건에 뒤따라 터진 부정 경선 의혹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는 급속히 위축되었고, 검찰의 수사로 총 462명이 부정 경선 혐의로 기소되었다.
거기에 이 사태는 부정 경선 사태를 넘어서 엉뚱한 방향으로 불이 붙는다.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립은 당권파, 소위 NL 계열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결국 케케묵은 것으로 여겨졌던 진보의 NL-PD 대립, 종북주의 논란 등이 ‘군자산의 약속’ 등의 문건 유출과 더불어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다. 거기에 이정희를 비롯한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북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통합진보당과 이정희의 이미지는 종북주의자로 굳어졌고, 이는 부정 경선 사태보다 훨씬 큰 타격이 되었다.
이후 비당권파는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을 창당. 이정희는 통합진보당에 잔류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을 선언하고, 경선에서 득표율 64.92%로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여론조사에서 1% 미만의 지지율을 보이며 주목받지 못했으나, 선거법에 따라 나선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유력한 후보인 박근혜를 몰아붙여 존재감을 재확인.
3. 진보의 아이유에서 종북주의자까지, 이정희 인생 설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