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만의 고유한 서사
영화 <라푼젤>은 우리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귀여운 동물 조연? 나온다. 끝없는 노래들? 나온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나 장면들? 당연히 나온다. 그것도 이번엔 3D로. 생기발랄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용감하고, 현명하기까지 한 여자 주인공? 물론 나온다. 그에 걸맞게 순진해서 주인공에게 장단맞춰주는 사람들? 빠지면 섭하다! 감화해 개심하는 남자? 나온다. 절대 뉘우치지 않아 파멸하는 악역? 두말할 필요 없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는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 이후 오랜만에 보는 전형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신기한 건 그렇게 매번 똑같은데도 거의 다 재미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매 작품마다 그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선 ‘자기애적(narcissistic) 부모’로부터 벗어나려는 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마녀의 ‘자기애적 양육’
주인공 라푼젤은 마녀의 탑에서 탈출한 후 환희와 죄책감 사이에서 널뛰듯 오락가락한다. 얼핏 보자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탑 밖으로 나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당연히 진작에 누려야 했던 그녀의 권리들이다. 제시간에 돌아가기만 한다면 엄마에게 걱정 끼칠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자책감 속에서 헤맨다. 도대체 왜? 그동안 그녀를 키운 마녀 때문이었다.
상담심리학자인 니나 브라운(N.Brown)은 자신의 책 <철없는 부모>(원제: Children of The Self-absorbed)에서 자기애적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절절하게 설명한다.
자기애적인 부모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치장할 장식품이나 자신을 숭배할 신도로 키우려드는 부모를 말한다. 이런 부모에게 키워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감이 부족하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늘 불안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영화 속 라푼젤처럼 말이다. 마녀가 라푼젤을 탑에 가두어두기 위해서 사용한 것도 바로 그런 나르시시스틱한 양육이었다.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
자기애적 부모의 특징
자기애적 부모의 대표적인 특징은 “모든 칭찬과 관심은 내 것”이라는 태도다. 이런 부모는 자식이 뭔가 이루어냈을 때 언제나 그것이 자기 덕분임을 강조하며, 자식을 흠집 내려 든다.
영화 속 마녀도 마찬가지다. 마녀가 부를 때마다 라푼젤이 자기 머리카락을 내려서 그녀를 탑 위로 끌어올려줌에도 불구하고 매번 충분히 빨리 자기를 올려주지 못한다고 타박을 한다. 하지만 (부족한 라푼젤과는 달리 자신은 너무도 훌륭한 엄마이기 때문에)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불만을 표할 뿐이다. 따라서 라푼젤이 진지하게 그에 대해 반박을 할 수도 없다. 아마 반박을 하려 든다면 엄마가 웃자고 한 말에 눈 똑바로 뜨고 달려드는 못된 딸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부모는 뭐든 자기가 하면 자식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녀와 라푼젤의 작별 인사는 언제나 이렇게 끝난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저는 더 엄마를 사랑해요.” “오, 엄마는 너를 최고로 사랑한단다.” 이 마지막 말에 숨겨진 건 “내가 너에게 주는 애정은 네가 나에게 주는 애정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가치 있는 거니까 입 닥쳐.” 라는 뜻이다.
‘자녀에 대한 착취’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이를 위해서 거짓말과 과장을 일삼고 정서적인 협박을 가하는 건 필수 부록이다. 마녀를 보라. 그 존재 자체가 라푼젤을 착취한 덕분이 아닌가. 그녀를 탑에 가두고 그녀의 마법에 의지해 생명을 부지하는 건 자신임에도, 마녀는 자기가 라푼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었는지 매일같이 유세한다.
자기애적 부모의 폐해
마녀의 논리에 따르면 라푼젤은 탑에 갇힌 것이 아니라 마녀 덕분에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니 늘 감사해야 한다. 라푼젤이 없으면 큰일 날 사람은 자기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라푼젤에게 “내가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세뇌시킨다. 그 뿐이 아니다. 마녀는 라푼젤의 그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 라푼젤이 충분히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마녀는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이고, 너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팔푼이라는 믿음을 라푼젤에게 은밀하게 주입시킨다. 이런 게 바로 정서적 협박이다.
물론 자기애적 부모는 허영심도 쩔어주신다. 마녀가 매일 탑에 들어와 제일 처음 하는 일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미모에 감탄하는 것이다. 마녀는 그 젊음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려든다. 라푼젤을 납치하고, 악당을 끌어들이고, 사람을 죽이는 모든 악행은 바로 그 허영심 때문이었다.
이런 부모는 자녀의 감정에 절대로 공감하지 않는다. 그저 감정을 이용해서 자녀를 조종하려 들 뿐이다. 다시 말해 이런 부모가 보이는 눈물이나 책망은 모두 자녀를 조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결국, 마녀는 라푼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매순간 그녀의 기를 죽이고, 겁을 주고,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자유로워지려는 모든 생각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도록 키워낸 것이었다. 마녀는 라푼젤을 탑에 가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그녀 마음에 심어둔 창살 속에 가두었다. 탑에서 벗어나는 건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마음의 창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것은 자기애적 부모에게 키워진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기애적 부모로부터 탈출하는 법
이 영화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도 바로 이 근처다. 영화는 라푼젤의 표정을 통해 그녀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복잡미묘한 갈등, 그녀가 겪을 필요가 없는 그 갈등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진짜 끝내주는 건 바로 그 표정들이다. 어찌 그리도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던지!! 관객들은 그 표정을 보며 이 아무 잘못 없는 소녀의 마음에 드리워진 창살의 그림자를 실감하고, 그녀가 그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그와 비슷한 창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창살의 주인은 부모일 수도. 직장 상사일수도, 선후배나 친구, 애인일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살아야 하는 현실은 영화처럼 쉽지도 않다. 영화 속에서야 너절한 건달조차도 라푼젤을 위해 헌신하지만, 세상은 (마녀의 가르침처럼) 당신이 약점을 보일 때마다 그걸 이용하려 달려드는 사람들 천지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 니나 브라운은 자기애적 부모의 창살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발자국은 부모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내 부모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니 이제 변해야 하는 건 내가 되는 거다. 부모로부터 나를 보호해야지 부모가 더 이상 나에게 상처 주지 않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 이걸 깨달을 때, 내가 살 길을 찾아 나서는 진정한 독립도, 부모와의 대등한 협상도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라푼젤도 그랬다. 그녀는 마녀의 정체를 깨달은 후에, 자기 남친의 목숨을 두고 마녀와 당당하게 협상을 해서 자기 요구를 관철해낸다. 비록 엄청난 희생을 각오한 협상이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마녀가 만든 감옥에 갇힌 인질이 아니었다.
원문: 싸이코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