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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시위의 문제: 책임의 주체인 지도부가 없는 느린 민주주의

2016년 8월 30일 by 바이커 sovidence

여러 사람들이 문제점을 얘기하는데, 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우선 다른 분들이 문제라고 하지만, 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점. 운동권 학생들을 배척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꿘” 배제는 충분히 이해할만하고 또한 문제로 삼을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모두를 포용하는 게 아니다

운동권 배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포인트는 이대의 벗님들 모두를 수용하는 민주주의라면서 그 구성원을 배제하는게 정당하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느린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란 학생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원리로써의 민주주의여야 하는게 아니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뜻을 함께한 사람들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으로써의 민주주의다. 운동권 배제 비판은 전자와 후자를 혼동한 것이다.

이화여대시위

이대본관을 점거한 학생들이 이대학생들의 공식 대표임을 주장했다면, 이들의 실체적 대표성 부족과 운동권 학생 배제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위는 온라인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주도해서 운동을 끌어나갈 권리가 이들에게 있다.

시위의 주체가 전체 학생의 대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학생과 일부 졸업생 만으로도 충분히 시위를 할 수 있고, 점거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운동권 사람들이 “시민연대”같은 단체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변모씨 같은 사람들을 참여시키지 않고 발언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

그렇게 했다고 시민연대의 정당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레토릭으로 모든 시민들의 참여를 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배타적 단체에서도 내부의 결정 메카니즘으로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다.

정리하면, 느린 민주주의를 이대 학생 자치단체의 조직 원리가 아닌 시위 주체들의 내부 의사 결정과정으로 이해하는 한, 운동권 배척과 민주주의 원리는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지도부 없는 이상한 민주주의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도부나 대표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시위 양식에서 지도부와 대표의 부재는 주체의 익명성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는 대화의 단절과 책임의 회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시위는 시위 주최 단체와 그 대표가 있거나, 1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했다. 성명서 같은 것을 내는데 단체와 대표가 없으면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했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지, 행위 주체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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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요구와 그 요구 실현을 위한 물리적 행동은 있는데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의 주체가 없는 상태, 이게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 방식인가? 대표가 없으니 당연히 협상도 할 수 없다. 서면 대화를 고집하며 직접 대화를 거부하면 무슨 협상이 되고 대화가 되겠는가.

이 방식이 협상의 여지를 차단하고 원래 정했던 궁극의 목표를 참여자들의 징계없이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데 효율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시위의 물리적 진압이 불가능할 때 그렇다. 대표로 협상장에 나오면 신분이 노출되어 행동에 대한 책임, 즉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을 크게 줄인다.

하지만 의사 표현의 자유를 넘어, 요구 사항의 실현을 위한 실력행사가 있는데, 이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운동 방식, 상대방에 대한 요구 사항이 있고 대화는 요구하지만 대화의 주체로 나올 대표가 없는 운동 방식. 이걸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더욱이 내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원문: SOVIDENCE

Filed Under: 사회

필자 바이커 sovidence twitter

사회학도. 노동시장, 경제불평등, 인종문제, 통계방법론이 주 관심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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